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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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프리즘]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

쾌락 위해 스릴러물만 즐기면
도파민 분비 대신 공포만 남아
보상 효과 큰 ‘깜짝쇼’ 원한다면
현실 바꾸는 우리의 노력이 먼저

그레고리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젊은 폴라와 결혼했다. 그리고는 아내를 설득해서 아내의 이모가 살던 집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이모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한다. 어쩔 수 없다. 이모의 짐을 모두 다락방에 모아두었다. 그레고리는 엄마의 브로치를 아내에게 선물하면서 “당신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잖아”란 걱정 어린 말을 덧붙였다. 아내는 정말로 브로치를 잃어버렸다. 집에서 물건이 사라진다. 알고 보니 아내가 감춘 것이다.

폴라는 배려가 넘치는 남편을 존경하지만 점차 두려운 존재로 느낀다. 저녁마다 일한답시고 남편이 외출하기만 하면 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다른 방에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가스등이 작아진다. 또 다락방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웬 환청인가! 폴라는 무섭고 두렵다. 자신이 미쳐가는 것 같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이 모든 것은 그레고리의 계획이었다. 그는 이십여 년 전 유럽 왕가의 보석을 훔치기 위해 폴라의 이모를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정작 보석은 찾지 못했다. 보석을 손에 넣기 위해 폴라와 결혼하고 폴라를 환자로 만든 것이다.

KBS TV 프로그램 ‘명화극장’에서 숱하게 봤던 1944년 개봉된 미국 스릴러 영화 ‘가스등’의 줄거리다. 여기서 정서적 학대를 뜻하는 가스등 효과(gaslight effect)라는 표현이 나왔다. 사진 찍을 때마다 파이팅을 외치는 우리는 그냥 편하게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콩그리시이고 편하고 좋다.

스릴러 영화는 크게 두 가지다.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 두 사람이 탁자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관객이 탁자 밑에 시한폭탄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안다. 두 사람은 모르지만 관객은 째깍째깍 타이머 숫자가 줄어드는 걸 보며 가슴을 졸인다. 이건 서스펜스다. 폭탄의 존재를 관객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폭탄이 터진다. 이건 서프라이즈다.

감독들은 당연히 서스펜스를 선호한다. 관객 역시 서스펜스를 즐긴다. 배는 침몰하고 백상아리가 선실로 들어오는 ‘죠스’의 장면을 상상해보시라. 빰빰빰빰 하는 배경음악은 서스펜스를 강화한다. 공포감의 30퍼센트는 음향에서 온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노라면 스트레스가 만땅이다.

왜 서스펜스 영화를 보는가? 공포감이 신경계를 자극하면서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을 분비한다. 도파민은 쾌락과 관련된 호르몬이다. 놀랍게도 공포가 쾌락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뇌에 더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서프라이즈다. 실험 참가자들 입에 청량음료를 주입하는 실험을 했는데 예고 없이 제공받은 사람의 뇌 보상센터가 높은 활성도를 보였다. 예상보다 좋은 경험을 하게 되면, 뇌 깊숙한 영역에서 신호를 보내고 도파민이 분비된다. 그러면 도파민이 현재 상황을 저장해서 미래에도 긍정적인 서프라이즈를 누릴 수 있게끔 돕는다.

스릴러 감독들이 서프라이즈보다는 서스펜스를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서스펜스는 긴장감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등’에서는 관객들은 금세 그레고리와 폴라의 관계를 파악한다. 외출, 가스등, 발걸음 소리의 고리 속에서 긴장감은 높아진다. 탁자 위의 두 사람의 평화로운 모습과 탁자 밑에서 줄어드는 시한폭탄 타이머를 번갈아 봐야 한다.

아무리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매일 ‘가스등’ ‘죠스’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도파민 따위는 작동하지 않는다. 오직 공포만 남을 뿐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탁자 아래에서는 기후 위기 타이머가 작동하는데, 탁자 위에서는 RE100 따위는 몰라도 된다는 장면이 스타카토 화법으로 음향효과가 더해져 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와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장면이 교차해서 상영된다. 탁자 위에서는 수백조 원의 과학기술 투자를 이야기하지만, 탁자 아래에서는 젊은 과학자들이 연구실을 떠나고 있다.

서스펜스에 비해 서프라이즈는 뇌에 보상 효과가 더 크지만 준비하기가 매우 어렵다. 서스펜스가 아닌 서프라이즈 효과를 보고 싶다. 영화야 감독에게 달렸지만 현실은 우리에게 달렸다. 가스등을 부수든지 남편을 쫓아내든지 우리가 결정할 때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