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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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전공의 공백 메우던 교수의 발인

의·정 갈등 한 달여 계속… 더 이상 애꿎은 희생 없길

전공의 1만1900여명이 의대 증원 방침에 병원을 떠난 지 27일로 37일째다. 전공의 93%가 등진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던 전임의가 떠났고, 이젠 수술을 집도해 온 스승들도 사직하겠다고 나섰다. 전공의 처벌을 수차례 경고한 정부는 면허정지를 앞두고 ‘유연한 처분’을 꺼내 대화하자고 했지만 불신의 벽을 허물진 못하고 있다.

정부는 부족한 의사 수를 5000명으로 추계했다. 비대면진료 한시적 전면 허용, 진료보조(PA) 간호사 역할 합법화 시범사업, 군의관·공중보건의 투입, 은퇴 의사 재배치, 개원의 타 기관 진료 허용 등 모든 방법을 꺼냈다. 하지만 전공의 공백을 실질적으로 메운 교수들마저 그간 쌓인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며 합법적 시간(주 52시간)만 근무하다 외래 진료까지 축소하겠다고 나서며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정재영 사회부 차장

어제(26일) 하루 벌어진 일을 돌아보면, 위기감의 주체가 정부도 의료계도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의료계를 향해 “의료개혁을 위한 정부와의 대화에 적극 나서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의료개혁 선제조건으로 ‘2000명 증원’을 고수하며 사흘째 같은 메시지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의료계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했는데, 증원에 호의적인 대학 총장과 병원장들만 만났다. 교수들은 “정부가 협의체 구성으로 생색내며 우리만 이용당하는 모임이라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고, 전공의들은 증원 및 필수의료패키지 철회 등에 노력하지 않으면 대화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정부 상층부에선 며칠 새 의료계와의 대화에 적극 나서는 모양새지만 현장의 공기는 너무 다르다. 보건복지부 박민수 2차관은 브리핑에서 “전공의들에 여러 차례 대화를 제안했지만 ‘대표가 없다’면서 대표단 구성 자체가 집단행동의 처벌 대상이 될 걸 두려워한다”며 “정부와 대화를 위해 대표단을 구성하는 것은 처벌 대상인 집단행동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미 처벌 대상으로 규정한 전공의들에게 ‘대화는 처벌되지 않는다’고 회유한 셈이다. 정부가 의대 증원과 관련해 의료계와 접촉한 게 100차례에 근접할 텐데, 전공의와 대화한 건 비공개 두 차례뿐인 데다 대표성이 없는 전공의라고 한다.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에 당선된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회장은 “전공의·의대생·교수 단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14만 의사를 결집해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의대 정원 500~1000명 감축, 필수의료패키지 폐기, 복지부 장·차관 파면 등을 대화 조건으로 걸었다. 대화를 거부한 것이다. 임 회장은 “의료계가 할 일은 전공의와 학생들을 믿어주고 그들에게 선배로서 기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적절한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도 했다.

전공의들은 ‘탕핑(?平·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저항)만이 이기는 길’이라는 입장이다. 생활이 어려워진 전공의에게 기저귀·분유를 후원한 노환규 전 의협 회장은 “정부는 표를 얻기 위해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의사 부족에 따른 의료대란을 염려하는 정부가 의사를 처벌할 수 없다고도 했다. ‘의대 증원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건 양측이 동의할 명제다. 정부의 증원 고수가 표 때문이라면, 의료계가 처벌 방침을 무시하고 탕핑하는 것이라면 모두 국민을 볼모로 한 무책임한 행동이다.

평소 환자에게 극진했고 전공의 공백에 따른 업무 과중을 호소하다 숨진 부산대병원 안과교수 발인도 26일이었다. 2주 앞으로 다가온 총선까지, 그 이후로도 더 이상 애꿎은 희생이 없길 바란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재영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