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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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우크라 전쟁과 북핵 악몽

北, 러에 밀착 핵보유국 지위 추구
국지도발 후 핵 무력 시위 가능성
트럼프집권 땐 핵안전핀 뽑힐 수도
日 수준 핵 잠재력 확보 서둘러야

카르길 분쟁은 핵무장국 사이에 벌어진 첫 전쟁이다. 파키스탄이 1999년 5월 영토분쟁지인 인도 카슈미르의 고원지대 카르길을 점령하면서 촉발됐다. 파키스탄군은 인도군의 거센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핵무기 폭격을 준비했다. 핵전쟁이 터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화들짝 놀란 미국의 압력에 파키스탄군이 두 달 만에 철수했고 전쟁은 인도의 승리로 끝났다. 원래 인도는 앙숙인 중국의 핵 보유에 자극받아 1970년대부터 핵 억지력 확보에 나섰다. 파키스탄도 적대국인 인도의 핵무장이 자국에 치명적 위협이라며 핵 개발에 열을 올렸다.

당시 두 나라는 수차례 핵실험 탓에 미국 등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았는데 파키스탄의 핵 무력시위는 미국의 정책을 핵확산 금지에서 분쟁관리로 바꿨다. 미국은 우호국인 인도와 14차례에 걸친 협상을 거쳐 2001년 모든 제재를 철회했고 2008년 원자력협정도 체결했다. 파키스탄도 인도에 묻어가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았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 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세력과 전쟁에 돌입하면서 인접국인 파키스탄의 협력이 필요했다. 카르길 분쟁은 북한과 인연이 깊다. 북한은 파키스탄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노동1호 미사일을 실어날랐고 대가로 핵기술을 전수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주춘렬 논설위원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렛대 삼아 파키스탄의 길을 가려는 징후가 가득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러시아에 수백만 발의 포탄과 재래식 무기를 대주고 정찰위성 관련 기술과 부품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만리경 1호에 이어 올해 3기를 추가로 쏜다. 정찰위성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어 핵전력 고도화에 필요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얼마 전 “북한이 자체적인 핵우산을 갖고 있다”며 사실상 북핵을 묵인했다. 푸틴은 5월 중국에 이어 북한도 방문할 듯하다. 이 자리에서 원자력 협력이 재개된다면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게 된다. 최근 북한이 북·중 정상회담에 공을 들이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북한은 4월 총선이나 11월 미 대선을 전후해 연평도 포격과 같은 국지적 도발을 병행할 수도 있다. 김정은은 이미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핵 무력을 동원해 남조선을 평정하겠다”고 공언했다. 북한은 카르길 분쟁을 흉내 내 대남 국지도발 이후 핵무기 사용을 위협할 것이라는 관측(김성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원)이 나온다.

미국의 기류도 심상치 않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 당국자는 “전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비핵화를 향한 ‘중간단계’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중간단계란 핵 동결이나 감축에 상응해 유엔제재 조치의 일부를 완화하는 것인데 북한이 노리는 ‘핵 군축 협상’과 다르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집권 때 북핵동결을 조건 삼아 제재를 해제하고 북핵 용인도 거론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으로서는 북핵 안전핀이 뽑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빅터 차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아시아 담당 부소장 겸 한국 석좌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 군사훈련 중단이 제기될 수 있다”며 “한국이 독자 핵무장에 나서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에 이어 한국, 일본, 대만 등 핵보유국이 꼬리를 물며 동북아 안보정세가 격랑에 휩싸일 수 있다.

윤석열정부는 과도한 가치외교로 대중·대러 관계를 악화시켜 화를 키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탄약을 우회 지원하는 바람에 러시아의 표적이 됐고 이는 핵 관련 기술의 북한 이전으로 이어졌다. 이제라도 북핵 고삐가 풀리지 않도록 대중, 대러 외교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러시아에 대해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상 비확산을 지켜야 하는 핵보유국이 대북 원자력 협력에 나서는 건 NPT 파괴행위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중국도 한반도 비핵화를 고수하고 있는 만큼 적절한 견제에 나서도록 외교역량을 모아야 한다. 우리 역시 자체 핵무장이 어렵다면 미국의 동의를 거쳐 최소 일본 수준의 핵무장 잠재력과 호주 수준의 핵잠수함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


주춘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