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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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Unsullied, Like a Lotus in Mud)’

불교 안에서 ‘나’로 살고자 정진
여성의 번뇌·염원 들여다 보다
호암미술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한·중·일 불교미술 여성관점에서 조명
日·獨 소장한 15세기 불전도 ‘한자리에’
‘백제의 미소’ 불상 등 미술품 92점 전시

‘이 좋은 인연으로 인하여 우리 주상 전하께서 성수만세하시고 자손이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으시며 또 성렬인명대왕대비 전하께서 성수 무병하시고 만세하시길 바라며 이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부처께서 이 속마음을 비춰 주실 것입니다.’(‘영산회도’ 중)

 

‘영산회도’ (개인 소장)

‘영산회도’는 자색 비단 위에 금선으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여래와 권속들을 그린 불화다. 그림 중앙 하단 순금으로 쓰인 발문에 따르면, 이 그림은 1560년 성렬인명대왕대비가 임금과 본인의 무병장수를 빌고, 왕실의 후사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조성한 것이다.

 

성렬인명대왕대비는 명종의 모후이자 조선시대 최강 불교신자인 문정왕후(1501∼1565)다. 문정왕후는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아들을 대신해 1545년부터 10년간 수렴청정했고, 1563년까지 섭정으로 정사에 관여했다. 개인 입장에서 불교미술품을 조성한 비빈들과 달리, 문정왕후는 통치자의 위치에서 정책적으로 불교중흥을 꾀했다는 차이가 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불교를 엄격히 통제했으나 왕실 여성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불교를 지지했다. 사관과 유생들은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서경’의 구절을 인용해 왕실 여성들의 불사를 줄기차게 비판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여성의 참여가 활발했던 ‘암탉이 울 때’에 불교 교단은 조선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품격 있는 불화와 불상을 대규모로 만들어 냈다. 

 

종묘를 받들고 후손을 이어가는 일은 왕실 여성들의 가장 큰 의무였으므로, 왕의 무병장수와 아들을 비는 이들의 발원에는 기복을 넘어서는 공적 측면이 있다. 

 

호암미술관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Unsullied, Like a Lotus in Mud)’이란 제목을 내걸고 6월16일까지 동아시아 불교미술을 본격 조망한다.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불교미술에 담긴 여성들의 번뇌와 염원, 공헌을 들여다보는 자리다.

 

전시 제목은 ‘숫타니파타’(부처의 말씀을 모아 놓은 최초의 불교 경전)에서 인용한 문구로, 불교미술을 후원하고 제작했던 ‘여성’들을 진흙에서 피되 진흙에 물들지 않는 청정 ‘연꽃’에 비유했다.

 

1세기쯤 부처의 가르침이 동아시아로 전해진 이래 여성은 불교를 지탱한 옹호자이자 불교미술의 후원자 또는 제작자로서 기여해왔다.

 

당시 여성들은 불교를 통해 소원을 빌고 이루어가는 성취감과 이로 인해 쌓은 공덕을 타인에게 돌리는 고귀한 기쁨을 알아 갔다. 이번 전시는 사회와 제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기’로서 살고자 했던 당대의 여성들을 찾아간다. 그동안 불교미술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승혜 큐레이터는 “동아시아 불교미술 속에서 불교는 여성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그리고 여성은 불교에서 어떤 가능성을 봤길래 맹렬히 불교에 귀의했는지, 두 가지 질문에서 시작한 전시”라고 귀띔했다.

 

‘석가출가도’(독일 쾰른동아시아미술관 소장)

1, 2부로 나뉜 전시는 불교미술 속에 재현된 여성상을 살피고 불교미술품의 후원자와 제작자로서 여성을 조명한다.

 

1부에서는 다양한 불전도(佛傳圖·석가모니의 일생 중 중요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그림)에 묘사된 어머니 이미지의 여성, 집착과 정념의 근원으로 간주했던 여성의 몸이 불화에서 묘사되는 방식, 여러 관음보살상과 보살도에 나타나는 여성형 관음보살, 승리의 여신이자 만복을 준다는 ‘마리지천’처럼 한국불교 속 여신 신앙의 일면 등을 살핀다.

 

2부에서는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불교를 지지했던 왕실 여성들이 후원자로 나서 조성한 불화나 불상, 머리카락을 바쳐 불보살의 형상을 수놓은 자수 불화 등을 볼 수 있다.

 

‘은제 마리지천 좌상’ (국립중앙박물관)

2년여간 준비 기간을 거친 이번 전시는 국내외 27개 컬렉션이 소장한 불화와 불상, 사경(寫經·불교 경전을 옮겨 적는 작업이나 그러한 경전), 나전경함(두루마리 형태의 불교 경전을 보관하던 상자), 자수, 도자기 등 다양한 장르의 불교미술품 90여건을 한데 모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국내 소장품으로는 리움미술관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중앙박물관 등 9곳 소장처의 국보 1건(장곡사 금동여래좌상 복장물)과 보물 10건 등 40건이 출품됐다. 이 중에는 16세기 ‘궁중숭불도’ 등 ‘이건희 컬렉션’ 9건도 포함됐다.

 

해외에 있는 불교미술품도 한국을 찾았다.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보스턴미술관 등 미국의 4개 기관과 영국박물관 등 유럽의 3개 기관, 도쿄국립박물관 등 일본의 11개 소장처에서 빌려온 일본 중요문화재 1건, 중요미술품 1건 등 52건이 포진했다.

 

‘석가탄생도’(일본 혼가쿠지 소장)

15세기 조선 불전도 세트인 ‘석가탄생도’(일본 혼가쿠지 소장)와 독일 쾰른동아시아미술관이 소장한 ‘석가출가도’도 챙겨볼 만하다. 석가모니 탄생을 전후한 여러 장면과 출가를 묘사한 불화로, 일본과 독일에 떨어져 있던 두 불화를 이번에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품인 조선 시대 불화 ‘석가여래삼존도’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 보물 ‘약사여래삼존도’도 이번 전시에서 처음 만났다. 문정왕후가 조성해 1565년 점안한 400폭 불화 중 일부다. 리움미술관 소장품인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1∼7’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진한국대부인 김씨(辰韓國大夫人 金氏)가 충혜왕(1315∼1344)의 영가천도(靈駕薦度·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것)를 기원하고 충목왕(1377∼1348)과 그 모후를 축원하고자 1345년 조성한 ‘법화경’ 사경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호암미술관 측은 “고려 후기 최고위층 여성 신도가 분명한 동기로 발원한 사경이라는 점에서 값지다”며 “막대한 재원과 뛰어난 장인이 투입돼 제작된 고려 사경의 걸작”이라고 설명했다.

 

‘금동 관음보살 입상’ (개인 소장)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1-7’ 중 ‘권4 변상도’ (리움미술관)

백제 ‘금동 관음보살 입상’을 비롯해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1∼7’ 등 9건은 국내에서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석가여래삼존도’ 등 해외 소장품 47건도 한국에서는 처음 전시되는 것이다.

 

일본 규슈국립박물관 소장품인 ‘구상시회권’과 혼가쿠지 소장품 ‘석가탄생도’ 등은 5월5일까지만 공개된다. 일본민예관 소장품 ‘구마노관심십계만다라’ 등은 5월7일부터 볼 수 있다.

 

전시 기간 화∼금요일 매일 두 차례 서울 리움미술관과 용인 호암미술관 간 무료 셔틀버스가 운영된다. 버스는 홈페이지에서 예약 후 이용할 수 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