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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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항시간·비용 30% 이상 절감… 물류 동맥경화 뚫을 지름길 [심층기획-국제 무역시대 물류 대안 '북극항로']

이집트 수에즈, 후티 반군 공격에 막혀
파나마는 폭염·가뭄에 수위 줄어 축소
러 북해안 지나 유럽·亞 잇는 북극항로
지구온난화로 해빙도 줄어 대안 급부상

한·중·일 등 동아시아 국가들 이용 전망
일부 구간 수심 낮아 대형선박 걸림돌
보급·환적 지원 기항 시설 사실상 전무
“북극 환경오염 가속” 우려 목소리도
2023년 중반 이후 국제 무역 시대 물류의 핵심인 ‘바닷길’이 위기에 빠졌다. 전쟁과 환경 위기 등으로 주요 항로 곳곳에서 위기가 발생한 탓이다. 이집트 수에즈운하는 예멘의 친이란 반군 후티의 영향으로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항로로 변했다. 이스라엘과 한창 전쟁 중인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정파 하마스를 지원한다는 명목하에 후티가 수에즈운하 앞바다인 홍해를 지나는 선박을 지속적으로 공격 중이고, 미국과 영국 등이 이에 대응하며 일촉즉발 상황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또 다른 핵심 무역 항로인 파나마운하는 지난해 여름 전 세계를 덮친 폭염과 가뭄 속 수위가 줄어들며 운영을 축소하기도 했다. 무역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안정적 운항이 가능한 항로의 존재가 필수적인데 전 세계 핵심 항로에 이 같은 지정학적, 환경적 변수가 속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관심을 받는 곳이 북극항로다. 현재 위기가 발생한 항로들과 지정학적 위치와 환경 등이 사실상 정반대인 덕분에 세계 무역의 대안 중 하나로 급부상하고 있다.

러시아 선적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왼쪽)이 쇄빙선과 함께 얼음을 헤치며 북극해를 항해하고 있다. 러시아 해무부 제공

◆동아시아-유럽 잇는 최단거리 항로

북극항로는 개척된 지 100년이 넘은 오래된 바닷길이다. 노르웨이의 전설적인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 1906년 북서항로를 개척했고, 이어 1920년 북동항로까지 개척했다. 이 중 러시아 북쪽 해안을 지나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를 일반적인 북극항로로 일컫는다. 다만, 이 북극항로는 개척 이후에도 오랫동안 무역에 활용되지는 못했다. 연중 상당 기간 바다가 얼어붙고, 위험한 해빙이 둥둥 떠다니는 척박한 환경 탓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파나마운하 등 열대지역 항로 운영을 위협해 온 지구온난화가 북극항로의 가능성을 열었다. 북극항로 항해의 최대 걸림돌인 얼음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국립설빙데이터센터(NSIDC)에 따르면 북극 해빙은 10년마다 13.1%씩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혹한으로 바다가 얼어붙는 1~2월을 제외한 대부분 시기에 안정적으로 항로를 운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운항 환경이 개선되며 북극항로는 21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물동량이 늘고 있었다. 1998년 140만t에 불과하던 북극항로 운송량은 해마다 늘어 2020년 이후에는 매년 3000만t 이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중이다. 여기에 최근 홍해 위기 영향으로 북극항로에 관심을 갖는 국가가 늘어나며 물동량이 더 커질 여지는 다분하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북극항로의 주요 이용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항로이기 때문이다.

해양수산부 자료에 따르면 부산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항로를 이용할 경우 대략 2만2000㎞를 운항해야 하는 반면 북극항로는 1만5000㎞로 연료비와 운송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 항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30% 이상의 해운물류 경쟁력이 강화된다. 북극항로의 이점은 세계 최대 수출국인 중국과 일본 등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이점이 충분한 가운데 그동안 이용해 온 핵심 항로인 수에즈운하에 위기가 발생했으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북극항로는 세계무역의 골칫거리 중 하나인 해적문제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롭다.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항해하려면 믈라카해협과 바브엘만데브해협을 지나야 하는데 두 곳은 전통적인 해적 위협지역이다.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에 위치한 믈라카해협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가장 중요한 뱃길이지만 가장 좁은 곳이 2.8㎞밖에 되지 않아 병목현상이 심한 탓에 해적들의 주요 공략목표가 돼 왔다. 2000년대 이후 매년 적게는 10여건부터 많게는 30여건까지 해적 행위가 발생했다.

북아프리카 소말리아 인근에 위치한 바브엘만데브해협도 해적 위험지대다. 한국의 청해부대를 포함한 전 세계적 소탕 활동으로 뜸했던 해적 활동이 최근 중동정세 불안으로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북극항로를 이용할 경우 이런 해적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지정학·환경적 위험도 존재

북극항로가 마냥 ‘가능성의 항로’인 것만은 아니다. 북극이라는 환경에 기인한 현실적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낮은 수심으로 대형 선박의 이동이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아시아와 유럽을 항해하는 선박의 경우 2만TEU(1TEU는 6.096m 길이 컨테이너 하나를 지칭하는 물류용어) 이상을 선적할 수 있어야만 경제성을 갖출 수 있는데 북극항로 일부 구간은 수심이 얕아 대형 선박이 통과하기 힘들다. 중간에 기착하며 보급과 환적 등을 할 수 있는 기항지 역시 사실상 전무하다.

항해에 필요한 항구 기반시설과 노동력도 부족하다. 바다얼음이 예전보다 적어지고 얇아졌지만 여전히 안전을 위해서는 얼음을 깨며 항로를 열어주는 쇄빙선의 호위를 받아야만 한다. 러시아가 북극항로 개척을 위해 쇄빙선 확충에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비용이 비싸 북극항로 항해의 경제성을 갉아먹고 있다.

현실적 제약은 기술과 주변 환경의 변화를 통해 장기적으로 극복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노르웨이 등 각국에서 얕은 수심에서도 많은 양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선박을 건조 중이다.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북극항로 상용화에 나서며 쇄빙선을 확충하고 북극 인근 정주도시 개발에도 나서고 있어 나머지 제약도 해소가 가능할 전망이다.

가장 큰 문제는 북극항로 역시 지정학적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러시아가 북극항로 활용에 핵심 키를 쥐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물류 등에 대한 제재가 본격화된 이후 북극항로 상용화에 가속 페달을 밟는 중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북극 지역 핵심 정착지 개발 회의에서 “북극은 러시아의 에너지 무역, 물류 능력, 국가안보와 연관돼 있기에 북극항로의 포괄적 개발은 국가 최우선순위”라고 지속적인 투자를 시사했다. 러시아는 항로 개발을 위해 향후 10년간 약 1조8000억루블(약 25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러시아는 중국에 러브콜도 보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중국에 “북극해를 함께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앞서 지난해 7월엔 러시아 에너지기업 가스프롬네프트와 로스네프트가 러시아 북서부 연안 프리모르스크항 등지에서 20만t가량의 원유를 중국으로 처음 운송하기도 했다. 세계 최대 무역국인 중국과 협력으로 북극해를 개발해 북극항로 상용화를 더 앞당기겠다는 복안이다.

중국 역시 2018년부터 스스로를 ‘북극 인접국’이라고 칭하고 북극이사회 옵서버로 활동하는 등 북극을 전략요충지로 여기고 있어 푸틴이 내민 손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북극항로가 일부 국가에 종속될 수 있다는 의미다. 국제적 위험 평가 연구기관인 리스크인텔리전스의 크리스천 비쇼프 유럽러시아 지역 연구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북극은 전통적으로 저긴장 지역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북극항로를 통과하는 해상 교통이 당장 심각한 안보 위협에 직면할 가능성은 낮다”면서도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북극항로가 서방이 기존에 가진 국제경제에서의 영향력을 희석시키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빅2’의 갈등이 점점 심화하는 상황이라 향후 북극항로가 이 갈등에 휘말릴 가능성은 충분하다.

북극항로 상용화가 온난화로 한창 변화하는 지구의 환경에 재앙을 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운항 선박 증가로 배기가스 배출이 늘어나면서 화석 연료의 불완전 연소로 만들어지는 대기오염 물질인 블랙 카본이 생성되고, 북극 지역 얼음이 더욱 빨리 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은 북극 물동량이 크게 늘기 시작한 2015∼2019년 유조선과 대형 화물선 등에서 배출된 블랙 카본 양이 85%나 증가했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에 선박 전복 등 사고 발생 시에는 더 큰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 환경단체들은 1989년 엑손 발데스사의 유조선이 북극지역인 알래스카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에서 좌초된 뒤 25년이 지난 현재까지 환경 피해가 지속되고 있다면서 “북극 생태계는 기름 유출과 같은 교란으로부터 회복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북극항로 내 민감한 지역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상상할 수 없는 해양 오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필웅 기자 seose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