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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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친, 격추된 KAL기 블랙박스 준다더니 번복 왜? [외교문서 비밀해제]

정부는 1992년 11월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9년 전 발생한 대한항공(KAL) 여객기 격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블랙박스 원본을 확보하려고 애썼으나, 무위로 돌아간 것으로 확인됐다.

 

29일 외교부가 공개한 1992∼1993년 외교문서에는 방한을 앞둔 옐친 대통령이 1992년 9월 10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전화해 KAL기 블랙박스 내용을 포함한 사건 관계자료를 공개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은 1983년 8월 31일 미국 뉴욕에서 출발해 서울을 향하던 KAL 여객기 KE-007기가 9월 1일 영공을 침범하자 전투기를 띄워 사할린 부근에서 미사일로 격추했다. 당시 여객기에는 승객 240명과 승무원 29명이 타고 있었다. 승객은 한국인이 81명, 외국인이 159명이었다. 외국인 중에는 미국 국적이 56명으로 가장 많고 일본 28명, 대만 23명, 필리핀 15명, 홍콩 12명 등이었다. 

 

옐친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한 전화에서 당시 행방이 묘연했던 블랙박스의 존재까지 알려준 것이었다. 러시아 측은 한국과 자료 전달 방식에 관한 협의도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9월 28∼30일 모스크바로 특사 파견을 요청했다. 정부는 특사 파견이 “국민 정서”에 맞지않는다며 난색을 보였지만, 러시아는 한국 특사의 대통령 예방 시간까지 10월 14일 오후 3시로 잡아놨다.

 

이때 우리 정부는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 협상이 진행 중이며, 옐친 대통령의 방한 때까지 미국을 기다리게 할 수 없다보니 한국에 특사 파견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미국 유족 대표가 같은 자료를 받으러 모스크바를 방문할 계획이 잡혀있었으며, 옐친 대통령과는 10월 14일 오후 5시에 만나기로 돼 있었다. 한국 특사의 예방 2시간 후 바로 미국 유족 대표를 만날 예정이었던 것이다.

 

당시 주러시아대사는 KAL기 격추 사건의 “일차적인 당사국”인 한국 측에 자료를 먼저 주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미국 측에 넘겨야 한다고 피력했으나, 러시아는끝내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결국 교통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꾸려 모스크바로 보내면서 “국내 여론”을 고려해 ‘특사’가 아니라 ‘정부 대표’라고 부르기로 했다. 옐친 대통령이 한국과 미국에 넘긴 자료는 블랙박스 자료를 분석한 문서였기에 주러대사는 “이번 사건을 완전히 종결한다는 의미에서 블랙박스 자체를 인도해달라”는 메시지를 러시아 측에 거듭 발신했다. 이에 호응하듯 옐친 대통령은 10월 29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비행기 운항 중에 녹음된 문서기록은 가지고 있는 바 만일 한국 측이 이 녹음테이프에 관심이 있다면 전달할 준비가 돼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옐친 대통령은 불과 2주 뒤인 11월 14일 모스크바 주재 한국 특파원단과 기자회견을 하면서 “한국 측이 KAL 자료 관련 의문점이 있다면 블랙박스 자체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전달할 수 있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옐친 대통령의 이러한 입장 변화에는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할 만한 대목이 있다.

 

주한미국대사관 측은 옐친 대통령의 기자회견 이틀 전인 11월 12일 한국 측에 KAL기 블랙박스를 ICAO와 같은 중립적 국제기구에 보내야 한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우여곡절 끝에 옐친 대통령은 11월 19일 노태우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계기로 블랙박스를 한국에 전달했다. 하지만 진상 규명의 핵심인 비행경로기록(FDR) 테이프는아예 없고, 조종석음성녹음(CVR) 테이프도 원본이 아닌 사본이었다. 결국 한국과 러시아, 미국, 일본은 12월 8∼9일 모스크바에서 만나 ICAO에 KAL기 격추 사건 재조사를 요청하기로 하면서 블랙박스 원본을 ICAO에 넘겨 해독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이 그토록 갈망하던 블랙박스 원본을 손에 넣은 것은 조사가 다 끝난 이듬해 7월이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본부가 있는 ICAO는 1993년 6월 14일 재조사 결과를 담은 최종 보고서를 채택했고, 7월 8일 몬트리올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FDR과 CVR 원본을 전달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