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만우절 거짓말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이라크가 보유한 대량살상무기(WMD)를 없애겠다며 미국·영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3년 4월1일 세계 각국 언론은 희한한 기사를 쏟아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일간지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자국을 떠나 남아공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며 “미국도 승낙했다”고 보도했다. 이라크의 패전, 그리고 후세인의 비참한 말로를 기억하는 우리로선 황당할 뿐이다. 일본의 어느 신문은 “도쿄 앞바다에서 유전이 발견됐다”며 “산유국 이라크의 매장량에 필적한다”고 대서특필했다. 역시나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모두 만우절을 계기 삼아 일부러 만들어낸 오보였다. 오죽하면 이날 홍콩 영화배우 장궈룽(張國榮·장국영)이 호텔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조차 처음에는 가짜뉴스 취급을 받았을까.

 

2011년 4월1일 만우절을 맞아 단국대 광고동아리 학생들이 만든 가짜 신문. ‘국내에서 유전이 발견됐다’ ‘강남과 신촌을 잇는 지하철이 개통했다’ ‘여성들에게 생리대가 무상 지급된다’ 등 오보로 채워져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만우절이 유럽에서 시작된 서양의 문화이다 보니 한국인들은 이른바 ‘만우절 거짓말’에 익숙하거나 관대하지 않은 편이다. 2008년 4월1일 스위스의 한 방송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작 동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실존 모델이 아직도 살아 스위스 어느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전형적인 만우절용 기사였다. 그런데 국내 한 언론사가 별 생각 없이 이를 인용해 보도했다가 그만 초대형 오보 사태로 비화했다. 논란이 확산하자 해당 언론사는 문제의 기사를 온라인에서 삭제했다. 이어 “경위를 불문하고 혼란을 일으킨 데 대해 독자들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외신 보도의 사실 여부를 철저히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만우절 벌어진 소동치고는 그 후폭풍이 너무 컸기에 언급하기 조심스럽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초기인 2020년 4월1일 어느 유명 연예인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본인의 코로나19 확진을 알렸다. 팬들은 물론 동료 연예인들도 안타까워하며 조속한 쾌유를 빌었다. 다들 너무나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비로소 사안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일까. 그는 “만우절 농담이었다”고 실토했다. 이어 “모든 처벌을 달게 받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성난 대중은 “허위사실 유포로 처벌해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팬들조차 “조금이라도 걱정했던 시간이 아깝다”며 등을 돌렸다. 오죽하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관계자가 정례 브리핑에서 “지금은 매우 엄중한 시기”라며 “장난 전화나 잘못된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다”는 말로 코로나19 관련 거짓말을 성토했으랴.

 

4월1일 만우절을 맞아 올해는 또 어떨지 걱정이 앞선다. 지인들끼리 농담처럼 주고받는 거짓말이야 용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23년 만우절 당일 ‘여인숙에 감금돼 있다’는 내용의 112 신고가 접수돼 경찰관 6명이 숨가쁘게 현장에 출동했으나 허위 신고로 판명이 난 사례 같은 일들이 반복되면 곤란하지 않을까. 꼭 만우절이 아니더라도 거짓 신고에 대한 처벌은 2021년 3757건, 2022년 3946건, 2023년 4871건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경찰은 전날 “만우절을 맞아 경찰력이 낭비되는 거짓 신고에 엄정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거짓 신고는 위급한 상황에서 경찰의 도움이 절실한 국민에게 큰 피해를 준다”고도 했다. 옳은 말이다. 하는 이나 듣는 이나 똑같이 즐거워야 농담이다. 그렇지 않으면 남을 속이는 사기에 불과할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