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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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적 이타주의' 실천가의 몰락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라는 말이 있다. 2010년대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에서 시작해 영·미 자본주의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용어라고 한다. 여기서 이타주의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을 위한 선행을 의미한다. 그런 이타주의 앞에 ‘효율’이 붙었다. 한마디로 최대의 자원을 확보한 다음 냉철한 사고와 계산을 토대로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파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과 일맥상통하는 개념 같기도 하다. 정치학자인 조홍식 숭실대 교수는 효율적 이타주의를 ‘돈벌이를 죄악시하지 말고 번 돈을 잘 쓰면 된다는 철학’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미국 암호화폐 거래소 FTX 설립자 샘 뱅크먼프리드. 회삿돈 횡령 및 배임 등 혐의로 기소돼 최근 1심에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았다. 게티이미지 제공

미국의 가상화페 거래소 FTX 창립자인 샘 뱅크먼프리드는 1992년생으로 현재 32세의 젊은이다. 20대 시절부터 ‘효율적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청년’이란 호평을 받으며 유명인이 되었다. 그는 가상화폐 거래와 투자를 ‘남을 돕는 선행의 수단’으로 규정한 바 있다. 언론 인터뷰에선 “세상을 도울 방법을 찾는 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FTX 산하에 자선단체를 세운 뒤 “내 수입의 99%를 기부하겠다”고 공언했다. 억만장자답지 않게 후줄근한 티셔츠와 덥수룩한 머리 등으로 서민 같은 이미지를 연출했다. 이런 모습에 대중은 열광했다. 테니스 선수 나오미 오사카 등 스타들이 그의 곁을 지켰다.

 

2019년 출범한 FTX는 한때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가상화폐 거래소였다. 그 창립자인 뱅크먼프리드에게 ‘코인왕’이란 별명이 붙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2022년 11월 FTX는 파산했다. 그간 여러 투자자들한테 받은 돈을 착실히 모아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다면 피할 수도 있었던 파국이었다. 그러나 뱅크먼프리드는 고객들이 믿고 맡긴 돈을 빼돌려 계열사 부채를 갚거나 해외 부동산을 구입하는 데 썼다. 파산 직후 바하마로 도주했던 그는 결국 붙잡혀 2022년 12월 미국으로 송환됐다.

 

28일 뉴욕남부 연방지법이 횡령과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뱅크먼프리드에게 징역 25년형을 선고했다. 애초 변호인들이 예상했던 5, 6년보다 훨씬 무거운 형이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근래 화이트칼라 범죄자에게 부과된 형량 중 가장 긴 사례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앞서 가상화폐 테나·루나 사태 주범으로 지목된 권도형이 미국보다는 한국에서 재판을 받고 싶다고 해 화제가 됐다. 한국이 그리 만만한가. 하긴, 뱅크먼프리드 1심 판결을 보니 권도형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