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집이지만 별수 없이 제가 그냥 사기로 했습니다.”
2021년 말 신혼집으로 서울 강북구 수유동 빌라를 전세로 임차한 김모(36)씨는 현재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집을 매입하려 준비 중이다.
지난해 말 계약이 만료돼 집주인에게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돌아온 대답은 “2년 전 가격을 지불할 세입자를 구할 수 없다”는 말뿐이었고, 결국 전세금 반환 청구 소송을 냈더니 지급능력 없는 주인 탓에 집이 경매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김씨는 “대출금 끼워서 전세금 2억5000만원을 냈는데 지금 매매가는 2억2000만원”이라며 “‘깡통전세’의 당사자가 내가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지난해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를 방지하겠다고 낮춘 전세금반환보험 가입 기준이 도리어 깡통전세로 인한 피해자를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차기 임차인이 대출할 수 있는 전세금이 기존보다 대폭 줄어든 탓이다.
빌라 가격 하락 추세에 전세사기로 인한 기피 현상까지 겹치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일각에서는 최근 정부가 확정한 ‘공시가격 현실화율 전면 폐지’가 이런 현상을 더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1일 부동산 경·공매 데이터 전문기업 지지옥션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소재 빌라의 경매 진행 건수는 총 1048건으로 1년 전(604건)보다 42% 급증했다. 2년 전(260건)과 비교할 땐 4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서울 내 빌라의 경매 진행 건수는 지난해 10월부터 지난달까지 줄곧 1000건 이상을 유지 중이다. 이는 2021년, 2022년 경매가 평균 300∼400건을 기록하던 것을 감안할 경우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빌라 경매가 급증한 이유로는 최근 전세사기 사태로 야기된 빌라 기피현상과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금반환보험 가입 기준 강화가 거론된다. 지난해 5월 국토교통부는 전세사기 피해를 예방하겠다는 취지로 HUG 전세금반환보험 가입 기준을 기존 공시가격의 150%에서 126%로 낮췄다. 시세 1억원 주택을 예로 들면 기존에는 전세금 1억700만원(공시가 7150만×150%)까지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9000만원 이하여야만 가입이 가능하다. 특히 빌라 전세 수요자 상당수가 자금 여유가 없어 HUG 등 정부 전세 대출을 이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임대인으로서는 전세금을 낮추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다.
하지만 전세금을 낮출 경우 이전 임차인에게 돌려줄 돈이 부족해진다. 소액일 경우 다른 곳에서 돈을 융통해 돌려줄 수 있겠지만 24%포인트 격차를 메우기에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빌라 공시가격이 하락세다. 세입자가 보증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전세금을 낮추되 차액을 월세로 돌리는 집주인이 느는 이유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2월 주택통계’에서 전국의 비아파트 전월세 거래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2022년 54.6%에서 지난해 66.0%, 올해 70.7%로 확대된 게 이를 보여 준다.
마강래 중앙대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는 “문재인정부에서 너무 단기간에 공시가격을 올렸다가 이번 정부에서는 또 급격히 낮춘다고 하니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다. 이번 공시가격 현실화율 전면 폐지도 의도치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급격한 공시가격 조정은 선의의 피해자를 낳는다”며 점진적이고 예측 가능한 정책 설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