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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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대법관 물러나라"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1933∼1945년 재임)는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인물을 뽑는 조사에서 매번 1, 2위를 다투는 훌륭한 지도자다. 하지만 옥에 티라고 그에게도 오점은 있다. 1930년대 대공황 극복을 위해 루스벨트가 주도해 만든 법률들이 연방대법원에서 줄줄이 위헌 판결을 받았다. 화가 난 그는 보수 색채가 짙은 대법원의 체질을 바꾸고자 사법개혁안을 내놓는다. 미국에선 대법관을 비롯한 연방법원 판사들 임기가 종신제다. 그런데 루스벨트는 이를 고쳐 대법관이 70세에 이르면 ‘은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70세가 된 대법관이 은퇴하지 않으면 한 사람마다 대법관 한 명씩을 추가로 임명한다는 내용도 개혁안에 포함됐다. 그렇게 해서 대법원장을 포함해 9명뿐인 대법관 정원을 최대 15명으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연방대법원 청사 전경. 미 대법원 홈페이지

행정부를 지지하는 대법관이 다수가 될 때까지 대법원을 압박하겠다는 의도가 무척 노골적이다. 루스벨트의 구상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사법권 독립 침해’라는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통령의 측근들조차 등을 돌렸다. 미국 법률가와 역사학자들은 이 사안을 들어 “대통령이 대법원을 무력화하겠다고 위협한 사례로 오늘날 기억되고 있다”고 꼬집는다. 대법원 개편 시도는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정치가 루스벨트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흑역사로 남아 있다.

 

2020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대법관은 생전에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연예계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사후 그를 바라보는 진보 진영의 평가는 달라졌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3년 대법관에 임명된 그가 너무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는 취지에서다. 실제로 버락 오바마 행정부 당시 민주당 안팎에선 “건강이 나쁜 긴즈버그가 종신 임기를 누릴 게 아니라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오바마 대통령에게 진보 성향의 젊은 대법관을 새로 임명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긴즈버그는 일축했다. 그가 암으로 숨졌을 때의 대통령은 강성 보수인 도널드 트럼프였다. 기다렸다는 듯 트럼프는 강성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후임 대법관에 발탁했다. 이로써 보수 6 대 진보 3 구도가 굳어진 대법원은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1973)을 반세기 만에 파기하는 등 보수 일변도로 치닫는 중이다. 진보 인사들은 긴즈버그의 노욕(老慾)이 미국 사법부를 망쳤다고 울분을 토한다.

소니아 소토마요르(69)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임명된 진보 성향 법률가다. 게티이미지 제공

미국의 진보 성향 언론인들이 3일 시사주간지 기고문에서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의 조속한 은퇴를 촉구했다. 현재 69세인 소토마요르는 오바마 시절 임명된 진보 성향 법률가다. 당뇨병을 앓는 등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보 인사들은 오는 11월 대선에서 트럼프가 이겨 재집권하고 소토마요르가 트럼프 2기 정부 임기 도중 타계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 후임자를 트럼프가 선택하는 경우 진보 대 보수가 현행 3 대 6에서 2 대 7로 격차가 더욱 벌어질 수 있어서다. 소토마요르의 후임 대법관은 어떻게든 조 바이든 행정부가 임명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소토마요르는 대응을 삼가고 백악관은 “전적으로 소토마요르 개인이 결정할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대법관의 종신 임기 보장은 오랫동안 미국 사법부 독립을 지탱하는 보루로 여겨져왔다. 이제 이념적 양극화와 진영 갈등의 극단화가 대법원과 대법관마저 정쟁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