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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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 누출됐는데…" 노동자들 대피시켰다고 징계받은 노조위원장 파기환송심 승소

작업장 노동자들을 대피시킨 노동조합 지회장에 대해 회사가 징계를 내린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파기환송심 판결이 나왔다.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행사가 인정된 것이다. 

 

대법원은 원심 판단에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며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고, 파기환송심 재판부 역시 회사의 손을 들어줬던 1·2심 판결을 뒤집고 회사 패소 판결을 했다.

 

대전고법은 4일 조모(50)씨가 자신이 다니던 세종시 소재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인 A사를 상대로 제기한 정직 처분 무효확인 소송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피고가 원고에 대해 한 2017년 1월 18일자 정직 처분이 무효임을 확인하고, 피고는 원고에게 770만원 및 이에 대한 지연 손해금을 지급하라”고 밝혔다.

 

2016년 7월 26일 오전 8시와 9시 30분쯤종시 부강산업단지 내 한 공장에서 황화수소를 발생시키는 화학물질 티오비스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현장 소방본부는 ‘사고 지점으로부터 반경 50m 거리까지 대피하라’고 방송했다. 반경 500m∼1㎞ 거리의 마을 주민들에게도 마을 이장을 통해 창문을 폐쇄하고 외부 출입을 자제하도록 안내했다.

 

A사 작업장은 사고 지점에서 200m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조씨는 다른 공장 노동자에게 사고 사실을 듣고 소방본부에 전화해 상황을 파악한 뒤 대피를 지시했다. 이에 총 28명의 조합원이 작업을 중단하고 작업장을 이탈했다.

 

이후 조씨는 7월 28일 기자회견을 열어 회사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회사는 조씨가 조합원들과 함께 작업장을 무단으로 이탈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며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조씨는 2017년 3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1·2심은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징계 사유가 있고 징계 양정도 적당하다”며 회사 측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 판단에 작업중지권 행사의 요건,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의 판단 기준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며 다시 재판하라고 판결했다.

 

지난달 14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회사 측은 "전체 노동자가 아닌 조씨 개인의 작업장 무단이탈에 대해 복귀명령을 내린 것이고, 이를 따르지 않아 징계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조씨 측은 “노조 지회장으로서 관행적으로 타임오프를 쓴 뒤 사후 승인을 받아왔음에도 징계를 내린 것은 이례적”이라고 반박했다.

 

조씨는 이날 파기환송심 판결 후 기자들과 만나 “사실 너무 상식적인 결론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법원 문을 두드렸던 건데, 승소하기까지 8년이 걸렸다”며 “이 판결을 계기로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이 실제 작업 중지권을 보편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민주노총 전국금속노조는 지난달 대전고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자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이라며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일터를 만들고 노동자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작업중지권이 실효성을 가져야 한다”며 작업중지권의 확대를 촉구했다.


대전=강은선 기자 groov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