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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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심상정과 조국의 ‘악연’

문재인정부 초반 심상정 의원이 대표이던 정의당은 장관 후보자 등에 조그만 흠집이라도 있으면 ‘임명 불가’를 선언했다. 해당 인사들이 줄줄이 낙마하며 ‘정의당 데스노트’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2019년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자녀 입시비리 혐의 등이 불거졌으나 정의당은 그를 데스노트에 올리길 주저했다. 당시 국회에서 한창 진행 중이던 선거법 개정 협상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 눈치를 본 결과로 풀이됐다.

협상의 핵심 쟁점은 비례대표제를 소수당에 유리하게 고치는 것이었다. 정의당 입장에선 민주당의 지원이 절실했다. 두 당이 손을 잡은 가운데 지금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이 탄생했다. ‘비례대표 의원 선출 방식이 너무 복잡하다’는 불만이 일자 심 의원은 “국민들은 산식(算式)이 필요 없다”고 발언해 구설에 올랐다. ‘국민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선거법 개정을 엄호한 것이다.

정의당이 조 후보자를 데스노트에 올리지 않자 청와대는 안심하고 임명을 강행했다. 대한민국을 두 쪽 낸 ‘조국 사태’의 시작이었다. 조 장관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정의당 지지자들조차 분통을 터뜨렸다. 정의당 지지율이 하락세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20대 총선과 같은 6석을 얻는 데 그쳤다. 2017년 대선 당시 6%를 넘긴 심 의원의 득표율도 2022년 대선에선 2.37%로 뚝 떨어졌다. 그제서야 심 의원은 조 전 장관 옹호에 대해 “정치적 오류였다”며 “제게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을 것”이라고 사과했지만 이미 늦었다.

정의당이 녹색당과 합쳐 만든 녹색정의당이 22대 총선에서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충격을 받은 심 의원은 어제 정계은퇴를 발표했다. 반면 조 전 장관이 대표인 조국혁신당은 비례대표만 12석을 확보했다. 심 의원이 주도해 만든 현행 선거법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간 선거 때마다 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대표는 정의당을 각각 찍어 온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번에 정의당 대신 조국혁신당을 택했다는 후문이다. 조국 사태 당시 데스노트를 덮은 결정을 놓고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을 것”이라던 심 의원의 탄식이 현실이 됐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