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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세월호 선체 앞에서 만난 20명… 그날을 말하다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희생자 304명이 10도 안팎의 차가운 바다 아래 가라앉았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흘러간 시간만큼 지상에 남은 이들은 저마다의 생활로 적당히 무디어져 갔다. 이제는 진도항으로 이름을 바꾼 팽목항 주변에는 노란색 유채꽃이 열 번의 봄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곱게 꽃문을 열었다. 사람도, 자연도 계절을 따라 본연의 모습을 찾아간 듯했다.

 

그러나 다시 마주한 참사에 슬픔은 어제와 같았다. 지난 7·8일 진도항과 세월호 선체가 접안된 목포 신항에서 만난 스무명의 추모객은 “참사가 얼마 전 일처럼 생생하다”고 입을 모았다. 세계일보는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참사 현장에서 만난 스무명이 기억하는 그날의 이야기를 담아 봤다.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다가오는 가운데 7일 세월호 선체 거치 장소인 전남 목포시 달동 신항만에 색이 바랜 노란 리본이 걸려 있다. 목포=최상수 기자

◆남정실(57)

 

“살 수 있는 아가들이 다 죽었으니 마음이 너무 아프지. 산 얘들도 그 모습이 얼마나 선명하겠어.”

 

진도항 ‘기다림의 등대’에서 한참이나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던 남씨는 “참혹했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남씨는 참사가 벌어진 동거차도 해역과 4㎞ 떨어진 서거차도에 산다. 침몰 지점과 가까워 사고 당일 바다에서 구조된 생존자들이 옮겨진 곳이다. 남씨는 굳은 몸으로 떨고 있는 학생들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뭐라도 먹으라며 부리나케 라면을 끓여 줬다.

 

참사 2년이 지난 후 대학생이 된 생존자들이 감사 인사를 전하러 남씨를 찾아왔다. 그는 바다가 무서워 더 일찍 오지 못했다는 학생들에게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노모(91)·박귀숙(62)

 

박씨는 치매에 걸린 노모의 손을 꼭 잡고 진도항 방파제 한쪽 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4674점의 추모 그림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잊는 병에 걸린 노령의 여인 옆으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힌 깃발이 바닷바람에 힘없이 나부꼈다.

 

참사 당시 박씨는 진도의 한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했다. 사고 당일 박씨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진도항과 30㎞ 떨어진 벽파항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났다. 뉴스를 보고 놀란 학부모들에게 걸려 온 전화로 박씨는 참사 소식을 접했다. 

 

“여기서 10년 전에 아가들이 300명 가까이 죽었다네. 배가 까바져서(뒤집어져서).” 박씨가 침몰 지점인 맹골수도 쪽을 바라보며 노모에게 말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딸의 말을 듣고 있던 노모는 참사 소식을 처음 접한 것처럼 “워메 눈물이 나오려 하네. 딱한 새끼들”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성훈(48)

 

진도항 방파제에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던 김씨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제수씨를 떠올렸다. 김씨는 “제수씨가 39세에 상을 당했는데, 세월호 희생자 대부분은 이보다 더 어리지 않느냐”며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텐데 마음이 너무 아프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자식 키우는 부모로서 참사가 지겨워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새끼 일이었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재다. 김씨는 “어린아이들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는 감히 지겹다는 생각을 못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오모(46)씨

 

오씨의 딸은 참사 당시 3살이었다. 13살이 돼 진도항 방파제를 함께 둘러보던 딸은 세월호 참사를 아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고개만 끄덕였다. 쑥스러운 듯 대답하지 못하는 딸을 대신해 오씨는 “아직 어려 무슨 일인지 정확히 모를 것”이라고 했다. 

 

희생자 유가족이 그린 추모 벽화를 둘러보던 딸은 “나랑 똑같은 이름이 있다”고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오씨는 “참사 땐 아이가 아직 어려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멀게만 느껴졌다“면서 “초등학생이 된 딸과 진도항에 오니 유가족의 마음이 느껴진다”며 옷소매로 젖은 눈가를 훔쳤다.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다가오는 가운데 지난 7일 전남 진도항(팽목항)에서 한 가족이 추모 벽화를 바라보고 있다. 진도=최상수 기자

◆이해린(27)

 

이씨는 안산 단원고 희생자 250명과 불과 한 살 차이다. 또래 친구들에게 일어난 일이라 기억은 더 생생하다. 그는 “학교에서 실시간으로 뉴스를 봤었다”며 “벌써 10년 전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는 전남 장흥 소재 한 입시 학원에서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친다. 이맘때가 되니 학생들을 볼 때마다 뭉클한 마음이 든다. 이씨는 “추모를 강요할 일은 아니겠지만, 같은 일이 다시 안 벌어지게 하려면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문현정(55)

 

광주에서 온 문씨는 남편과 여행 중 우연히 진도항에 들렸다. 참사가 일어난 곳인 줄도 몰랐다. 진도항 벽면에 ‘사랑하는 딸아 보고 싶다’ ‘2학년 9반 예쁜 딸들 사랑해’라고 적힌 추모글을 보던 문씨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10년 전 그날 문씨는 집에서 벌집을 발견했다. 정신없이 119에 신고하던 와중에 TV로 참사 소식을 접했다. 세 아들을 둔 문씨는 배에 탄 이들의 구조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밤늦게까지 TV를 켜 놓았다. 문씨는 “어른들의 잘못으로 살 수 있는 얘들이 죽었다”며 “평생 그 부모들은 가슴에 안고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김월매(80)·김춘례(74)

 

팽목마을 주민. 두 할머니는 참사를 두고 “난리도 그런 난리는 없었다”고 기억했다. 마을 언덕 너머까지 차가 줄지어 있었다. 경찰·언론·시민단체가 몰려 와 방을 내어주고 음식도 건네줬다. 택배 하나도 경찰한테 신고해서 받아야 했다.

 

두 할머니는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이런 불편함을 감수했다. 월매 할머니는 “한창 꽃 피워야 할 청춘들이 바다에 쏟아졌다”며 “얘들이 불쌍하다”고 되뇌었다.  

 

◆임남곤(56)

 

임씨는 팽목마을 이장이다. 진도항 방파제에서 만난 임씨는 10년 세월에 색 바랜 노란 리본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새로 달릴 리본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장으로서 마을 주민과 세월호 추모 단체 사이의 갈등을 조정한다. 양측의 입장은 희생자 추모 공간 등을 두고 자주 엇갈린다.

 

그럴 때마다 임씨가 강조하는 건 ‘소통’이다. 임씨는 “역지사지의 자세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세월호 유가족, 동료 시민들도 끊임없이 교류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7일 전남 진도 진도항(팽목항)에서 팽목마을 이장 임남곤(56·왼쪽)씨와 자원봉사자가 낡은 노란 리본을 정리하고 있다. 진도=최상수 기자

◆임정자(58)

 

시민단체 ‘팽목바람길’ 사무국장 임씨는 진도항 지킴이로 활동 중이다. 10년 전 경기도 여주 자택에서 신문을 통해 참사 소식을 접하자마자 진도로 내려왔다. 손 쓸 수 있는 게 없어 집에 돌아가려는데 등대에서 짐승 울부짖음이 들렸다. 희생자 유가족이 바다를 향해 아이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소리였다. 그날부터 임씨는 진도 앞바다를 떠날 수 없었다. 

 

동화작가인 임씨는 아이들이 안전한 세상을 꿈꾸며 글을 쓴다. 그는 “어른의 책무는 다음 세대 아이들이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우리가 진도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그런 사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미주(42)·최재석(42)

 

진도가 고향인 김씨는 4월이 되면 가족들과 진도항을 찾는다. 남편 최씨와 13살, 9살 두 아들은 익숙한 듯 ‘세월호 팽목기억관’에서 희생자를 추모했다. 때마침 색 바랜 기억관에 노란색 페인트칠을 하는 자원봉사자들 곁에 김씨 가족이 합류해 도왔다. 

 

사고 당일 전원 구조 오보가 나오자 김씨의 어머니는 다급히 가족 단체 대화방(단톡방)에 “사실이 아니다”라고 보냈다. 김씨 어머닌 첫 희생자가 실려 온 전남 목포한국병원 인근에 살았다. 모두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 내릴 때 김씨만 발을 동동 구르며 구조를 기원했다. 

 

김씨와 최씨는 ‘잊지 말아요’라는 글씨가 적힌 노란 팔찌를 항상 차고 다닌다. 두 아들에게도 참사 얘기를 자주 한다. 김씨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 공부해야 이런 일을 또다시 겪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했다. 

 

지난 7일 전남 진도 진도항(팽목항) 인근 ‘세월호 팽목기억관’에서 김미주(42·왼쪽 두번째)씨 가족이 기억관을 노랗게 칠하고 있다. 진도=최상수 기자

◆김신영(32)

 

김씨는 남자친구와 함께 6년 만에 목포 신항을 찾았다. 10년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세월호가 접안된 곳이다. 아파트 10층 높이의 거대한 선체는 대부분 붉게 부식돼 있었다. 녹슨 장비에서 나는 삐걱대는 소음이 항구를 가득 채웠다.

 

김씨는 그사이 더 변해 버린 세월호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멍하니 선체를 바라보다 “노란 리본도 빛이 바랬고, 배에는 녹슨 쇠창살만 남아 있는 것 같다”며 “그간 정말 잊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참사 당시 김씨는 막 광주에 있는 사범대에 입학한 터였다. 그는 “당시에는 희생자들이 눈에 밟혀서 동기들과 버스를 타고 진도를 오가며 추모했다”며 “누군가에게는 10년이 긴 세월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할 것”이라고 했다.

 

◆박모(31)씨

 

박씨는 목포 소재 한 특수학교 교사다. 직접 방문하기가 힘든 학생들을 대신해 이곳을 찾았다. 박씨는 녹슨 선체를 보니 10년 전 그날이 생생히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함께 오지 못한 학생들에게 보여줄 세월호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박씨는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함께 애도하고 잊지 말자’고 말하려 한다”고 했다. 

 

◆이모(64)씨

 

충청도에서 온 관광버스 기사. 그의 차에서 내린 30여명의 단체 관광객이 신항 입구를 가득 채웠다. 이씨는 목포에 올 때마다 이곳에 들려 관광객들과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그는 “가슴이 아프다는 얘기밖에는 더 할 게 없다”며 “선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무겁다”고 짧게 얘기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지난 7일 전남 목포 신항에서 하해정(54·왼쪽 두번째)·오진우(54·왼쪽)씨 부부가 거치된 세월호 선체를 바라보고 있다. 목포=최상수 기자

◆임영희(52)·하해정(54)·서영희(57)·오진우(54)

 

하씨는 직장 동료 오씨와 차 타고 해남으로 부부 동반 여행을 가던 중 저 멀리 녹슨 배를 보고 혹시나 싶어 들렸다고 했다. 경남 창원에서 버스 기사로 일하는 두 사람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컥한다.

 

매일 듣던 라디오도 함부로 틀 수 없었던 날들이다. 자식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부모 목소리에 울고, 천진난만한 희생자의 마지막 대화 소리에 또 울었다. 급기야 슬픈 노래가 흘러나오면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눈물이 나왔다. 하씨는 “그게 거의 1년 갔다”며 “우리 애들이랑 나이가 비슷하니까 더 안타까웠다”라고 전했다.


이예림 기자 yea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