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당시 서독)이 전후 이룩한 눈부신 경제성장은 흔히 ‘라인강의 기적’으로 통한다. 1960년대 공장 등에서 일할 인력이 부족했던 서독은 튀르키예로부터 80만명 넘는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였다. 그 후손을 비롯해 오늘날 300만명가량의 튀르키예계 주민이 독일에 살고 있다. 유럽연합(EU) 역내 1위 경제대국 독일의 부흥 뒤에는 튀르키예 출신 이민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들어 있다.
양념한 고기를 구워 채소와 함께 먹는 케밥은 튀르키예를 대표하는 전통 음식이다. 튀르키예계 주민이 워낙 많다 보니 독일에서도 케밥은 커다란 사랑을 받는다. 연간 매출액이 70억유로(약 10조3000억원)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독일 대통령실이 케밥을 가리켜 “독일의 국민 음식이 됐다”고 평가했겠는가. 케밥 식당 운영을 통해 경제적 부를 일군 튀르키예계 주민은 독일인들 사이에 ‘가장 성공한 이주민’으로 여겨지며 부러움을 산다.
베를린에서 3대째 케밥 음식점을 운영하는 아리프 켈레스는 튀르키예 출신 이주노동자의 손자다. 그의 조부는 튀르키예에서 독일로 이주한 뒤 공장 등에서 힘겹게 일하다가 1986년에야 식당을 차렸다고 한다. 어느덧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가운데 워낙 판매량이 많고 인기도 좋으니 사람들은 주저 없이 켈레스를 ‘케밥의 달인’이라고 부른다.
그제부터 사흘 일정으로 튀르키예를 방문 중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수행단에 켈레스를 포함시켜 눈길을 끈다. 외신은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이 탑승한 독일 공군 1호기가 케밥 200인분을 만들 수 있는 고기 60㎏도 함께 수송했다고 전했다. 이는 튀르키예 최대 도시 이스탄불에서 열린 독일 대통령 환영 리셉션 때 켈레스가 직접 만들어 선보인 케밥의 재료로 쓰였다. 켈레스는 “내 조상이 살았던 땅으로 가는 이번 여정에 동행하게 돼 무척 영광스럽다”는 소감을 밝혔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1960년대부터 낯설고 물선 독일에서 고생한 튀르키예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노고를 기리며 “독일 재건에 크게 기여했다”고 감사를 표했다. 저출산 여파에 이민 확대를 고려하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설왕설래] 독일 대통령의 ‘케밥 외교’
기사입력 2024-04-23 23:34:06
기사수정 2024-04-23 23:34:05
기사수정 2024-04-23 23:34:05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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