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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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1000원’의 위안…사라져가던 잔술 문화 부활하나 [밀착취재]

“여기 소주 한 잔 주세요” 앞으로 식당서 '잔술' 판매
주류업계 “잔술 문화 확산·보편화 어려울 것”

“요즘 이 돈으로 술 먹을 수 있는 곳이 없어, 사장님이 나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장사했으면 좋겠어.”

 

근처 무료 급식소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왔다는 70대 노 씨가 잔 술을 주문하며 말했다. 그는 “노령연금 30만 원으로 한 달을 버티는데, 어떻게 한 병에 5000원 넘는 술을 사 먹어. 여기 오가며 술 한잔하는 게 유일한 낙이야”라고 했다.  

 

10일 오후 1시가 되자 부자촌 골목은 노인들로 가득 찼다. 박윤희 기자 

 

10일 오후 서울 탑골공원 옆 송해길에 위치한 노포집 ‘부자촌’을 찾았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이미 거리는 어르신들로 가득 찼다. 현재 노 씨처럼 10년 넘게 꾸준히 이곳을 찾는 손님은 10여 명이라고 했다. 경제가 안 좋아 지면서 주말엔 젊은층도 이 곳을 찾는 이들이 늘었다고. 

 

◆ 막걸리 한 사발 1000원 인기…어르신들 “더 비싸지면 여기도 못 와”

 

‘부자촌’은 종로에서 ‘1000원 잔술’을 파는 유일한 곳이다. 인근 ‘뚱순네’도 잔술을 팔았지만, 인건비 부담 때문에 현재는 운영하지 않는다. 지폐 두 장을 내밀자 주먹만 한 사발을 가득 채운 막걸리와 소주를 내어줬다. 형님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는 노 씨는 소주를 따르며 “내가 여기서 처음 일할 땐 소주를 종이컵 가득 내어줬는데, 가격이 너무 올랐어, 그래서 좀 작은 컵으로 바꿨지”라고 했다.

 

1000원짜리 두 장을 내밀자 주먹만 한 사발을 가득 채운 막걸리와 소주를 내어줬다. 박윤희 기자

그 뒤로도 몇몇 어르신들이 그늘진 현수막 아래로 들어와 “한 잔 줘~”를 외쳤다. 출출하다고 한 잔, 입가심으로 한 잔. 저마다 다른 사연으로 이곳을 찾았다.

 

통계청이 지난 2일 발표한 ‘4월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3.99(2029년=100)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2.9% 올랐다.

 

탁주에 붙는 ‘주세’도 막걸리 가격 가격을 끌어올리는 요인이다. 국세법령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20년 1월~2021년 2월 ℓ(리터)당 41.7원였던 주세는 꾸준히 올라 2023년 4월 리터당 44.4원을 기록했다. 원료값·유통비 등 상승에 더해 불어나는 주세는 자연스레 막걸리 출고가 인상으로 나타났다.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던 70대 김 모 씨는 “여기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지. 그런데 여기도 장사하는 건데 남으려면 가격을 올려야 하지 않겠어? 근데 더 비싸지면 나는 못 와”라고 말했다.

 

부자촌에서는 1000원짜리 잔술을 사면 강냉이와 김치부침개 등 다양한 안주가 무료다. 박윤희 기자

20년째 이 자리를 지켜온 부자촌 사장 전영길(77) 씨는 “잔술이 사라지는 이유는 인건비 때문이다. 많이 파는 날 하루 10만 원, 평일은 5만 원 정도를 파는데 인건비가 그보다 비싸니 유지를 못 하는 것”라고 말했다.

 

식당 안으로 자리를 옮기니 홀로 점심을 해결하려 온 사람들로 테이블이 반쯤 찬 상태였다. 냉면, 닭곰탕 같은 일반식을 5000~8000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녹두전(5000원)과 반계탕(5000원), 소주 1병(4000원)을 주문했다.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진수성찬이다.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바로 옆 테이블에 70대 중반의 노 씨가 자리를 잡고 반계탕과 소주 1병을 주문했다. 그는 “10년 째 이 집을 찾고 있다”며 “저렴한 가격과 맛 때문에 여기를 찾는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사장님이 자리로 와 “여기가 '만원의 행복'집이지”라며 껄껄 웃었다. 

 

가게에 머무르는 한 시간 동안 지켜보니 이 곳을 찾는 이들 대부분 어르신이었다. 전 씨는 “작년 1월 메뉴 가격을 1000원씩 올린 후 그대로다. 원자재 값이 올라 사람을 안 쓰고 우리가 운영한다”고 했다. 이어 “그마나 주말엔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하루 70만원가량 번다. 평일엔 그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김민정(70) 씨도 “가격을 올리고 싶어도 찾아주는 손님들 생각하면 그마저도 힘들다. 우리가 얼마나 더 할 수 있겠나. 잘 먹고 간다는 말 들으면 저절로 힘이 난다”고 말했다. 

 

반계탕(5000원)과 녹두전(5000원), 소주 1병(4000원)을 주문했다. 박윤희 기자

◆ 기재부, 주류 면허 취소 규정 완화

 

앞으로 식당이나 술집에서 소주 등 모든 주류의 잔술 판매가 법적으로 가능해질 전망이다. 기획재정부(기재부)가 최근 주류 면허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주류를 술잔에 나누어 판매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주류를 냉각(얼리는 것을 포함한다)하거나 가열하여 판매하는 경우’와 ‘주류에 물료를 즉석에서 섞어 판매하는 경우’도 주류 판매업 면허 취소 예외사유로 규정했다.

 

그동안 칵테일이나 맥주 이외의 술을 잔술로 판매하는 것은 불법의 여지가 있었다. 술을 판매하는 사람이 임의로 가공하거나 조작하는 것을 주세법이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잔술은 '이윤이 크지 않아' 대다수 식당에서 판매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위스키나 와인 등 주류를 잔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법리와 실제 주류 판매 문화간에 괴리감이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에 국세청은 모든 잔술 판매를 술을 가공·조작하는 행위로 보지 않겠다는 내용을 주세법 기본통칙에 포함시켰다. 

 

기재부는 “국세청 통칙에는 이미 잔술 판매를 허용하고 있기에 지금도 잔술 판매가 불법이 아니다”며 “명확히 하는 차원에서 시행령을 개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류 업계는 '인건비 인상' 등으로 잔술을 판매하는 가게가 크게 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잔술이 판매될 경우 주류 업체의 매출이 하락할 것으로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반면 '가벼운 음주'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져 찾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용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자영업자는 “메뉴에서 어느 정도 남아야 잔 술을 팔 수 있을 것”이라며 “위생적인 문제도 있어 손님들이 얼마나 찾을지는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글·사진=박윤희 기자 py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