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의 경사스러운 태양절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지금…”(2023년 4월12일 민주조선)
“민족 최대의 경사스러운 명절을 맞이하는 온 나라 인민의 환희가…”(2024년 4월15일 민주조선)
북한이 ‘태양절’을 지우기 시작했다. 권력 승계 작업의 일환이란 분석이 나온다.
◆희미해지는 ‘태양절’
북한의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에는 매년 4월15일이 다가오면 개인 필명의 논설로 ‘김일성 위인전’ 격의 기사가 실린다.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로 기리는 김일성 주석 생일에 김일성의 위대성을 상기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 논설에선 돌연 ‘태양절’이니, ‘태양’이니 하는 말이 쏙 빠졌다. 지난달 15일 민주조선에 실린 개인 필명의 논설 전문에는 ‘민족 최대 경사스러운 명절’, ‘크나큰 혁명적 명절’이라고만 쓰였다.
심상치 않던 징후는 외부 세계에까지 통보된 것이 확인되면서 보다 선명해졌다. 중국 베이징에 있는 북한 관광 여행사 고려투어는 지난달 25일 자사 홈페이지에 “북한 파트너로부터 ‘태양절’ 명칭이 단계적으로 폐기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공지했다. 이어 “북한 국영매체에서 발표되지 않았지만 이 같은 점진적인 삭제는 일반적으로 발표되지 않는다”며 “우리는 변경 사항을 우리의 웹사이트에 반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에서 태양절은 최고지도자 우상화 장치의 상징이다. 김일성은 생전 유일지배체제를 공고화한 뒤, 사후에는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로 신격화됐다. 생전에는 ‘주체의 태양’, ‘민족의 태양’ 등으로 불렸고 사망 3년 후인 1997년 김일성 생일은 태양절이라는 공휴일로 지정됐다.
◆태양절 대신 은하절 생기나?
김일성이 곧 태양이라는 절대권력으로 굳어진 것은 절대권력의 후계자가 자연스럽게 권력을 세습하는 정당화 장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습 3대째에 이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는 이러한 유훈통치의 제도화가 양날의 칼이란 분석이 적잖았다. 권력을 이어받는 초기에는 도움이 되지만 결국 김일성-김정일이라는 절대권력을 뛰어넘지는 못한다는 한계로 정권의 취약성이 된다는 것이다.
고려투어 안내대로 태양절이 단계적으로 폐기되는 중이라면 권력 승계와의 연관성은 특히 높아진다. 정교진 SPN 북한분석실장에 따르면 북한에서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최고지도자가 변하는 동안 태양 상징도 점진적으로 따라왔다. 김일성을 ‘주체의 태양’ ‘민족의 태양’으로 지칭하다 1994년 사망 후 김정일이 ‘태양의 위업’을 이어받은 지도자로 지칭됐다. 김정일에게 간접적으로 태양 이미지를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는 김정일을 ‘선군태양’이라며 김정일만을 위한 고유한 태양 수식어가 붙었다. 이제 태양은 김정일임을 점차 강력하게 이미지화한 셈이다.
김정은을 태양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작업은 진행 중이다. 2011년 김정일 사후 김정은이 집권하자 2012년 노동신문에 게재된 김정은 찬양 시에서 “우리 앞길에 태양이 빛난다/아 김정은 동지”라는 식으로 태양 비유가 이용됐다. 2014년에는 러시아 감독이 만든 ‘태양 아래’란 다큐멘터리에서 ‘김정은 원수님은 21세기 태양이시다’라며 김정은을 태양과 더 강하게 등치하는 문구들이 포착되기도 했고, 현재 ‘세계의 태양’이란 수식어 사용 빈도가 늘고 있다.
간접적 표현에서 직접적 지칭으로, 은유에서 직유로 ‘태양 수사’는 수십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강화되곤 했다. 정 실장은 “태양 이미지를 입힐 때 항상 신중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한다”며 “태양이 오직 김일성뿐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주민들이 처음에 낯설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태양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고도의 전술”이라고 했다.
올해 포착된 ‘태양절 지우기’가 태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권력 이양 차원에서 태양 이미지를 김정은에 더 강하게 옮겨 오려는 것이라면, 김정은 역시 신격화의 길을 갈 거란 우려가 나올 수 있다. 2016년 김정은 생일인 1월8일이 김일성·김정일처럼 기념일로 제정되고 ‘은하절’로 명명될 것이라던 북한 내부 소식통 인용 보도들이 재조명될 수도 있다.
김주애 후계자 내정설을 제기해 온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센터장은 “북한이 권력 승계를 준비 중이기 때문에 김정은 지위를 절대화할 필요가 있다”며 “김정은 생일도 민족 최대의 명절로 기념하려면 기존 김일성, 김정일 생일은 축소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태양이 너무 많아도 주민이 힘들 것”이라며 “1월부터 4월까지 생일 행사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