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강원 홍천군에서 애호박 농사를 짓는 B씨는 지난해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 계절근로자 때문에 큰 손해를 봤다. 애호박은 적기에 수확하지 않으면 표면에 씌운 비닐이 터지면서 상품성이 떨어지는데, 배정받은 외국인 근로자가 시력이 좋지 않아 상당량을 수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절근로자를 중간에 내보내면 이듬해까지 새로 배정받을 수 없는 데다 내국인을 구하기도 힘들어 B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 일해야 했다. 그는 “외국인 계절근로자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며 “수요는 많은데, 배정받을 수 있는 인원은 토지 규모에 따라 최대 4명에 불과하다”고 하소연했다.
각지의 일선 산업현장에서 외국인 근로자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 인구감소 여파로 일손이 급격하게 줄고, 일명 3D(더럽고(Dirty) 위험하고(Dangerous) 어려운(Difficult) 일) 업종 기피현상이 심화하면서다. 건설업과 농업 등 분야에선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일을 못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정부가 매년 외국인 근로자 입국허용 규모를 늘리고 있지만 지역에선 여전히 인력 부족을 호소한다.
◆외국인 근로자, 기반 열악한 지역 ‘기피’
15일 고용노동부와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 고용허가제를 통해 국내에 입국하는 외국인은 총 16만5000명이다. 지난해 12만명보다 37.5%(4만5000명) 는 것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고용허가제는 내국인을 고용하지 못해 인력난을 겪는 사업장에서 합법적으로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다. 2004년 시행 후 매년 5만명 안팎이 입국했으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2022년 6만9000명으로 확대되는 등 최근 3년 새 규모가 3배로 늘었다.
농번기 농가에서 주로 일하는 외국인 계절근로자도 증가세다. 정식 도입 첫해인 2017년 1085명이 입국했다. 이듬해부터 두 배인 2824명으로 늘더니 2022년 1만630명, 2023년 3만2489명, 지난해 3만2489명까지 급증했다. 여기에 각종 취업자격 비자를 가지고 국내에 합법적으로 체류 중인 외국인을 포함하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외국인 근로자는 52만2000명에 달한다.
외국인 근로자가 늘고 있지만 지역에서는 여전히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입을 모은다. 생활기반이나 근로여건, 임금수준이 수도권보다 열악해 일하려는 외국인이 많지 않은 탓이다. 계절근로자 수급도 문제다. 농가 수요조사를 거쳐 각 지역에 배정되는 계절근로자가 100명이라면 매년 입국하는 인원은 70~80명에 불과하다. 가령 지난해 정부가 입국을 허가한 계절근로자는 4만647명이었는데, 실제 입국한 인원은 3만2489명(79%)에 그쳤다.
◆전용기숙사 신축 등 정주여건 개선 박차
이처럼 인력 부족 현상이 지속되자 각 지방자치단체는 외국인 근로자 유치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표적인 정책이 정주여건 개선이다. 지자체들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열악한 근로조건을 이유로 이탈하거나 불법체류자로 전락하지 않도록 기숙사 신축을 추진 중이다. 경기도는 외국인 근로자 주거환경 개선책의 일환으로 ‘외국인 근로자 전용 공공기숙사 설립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경기 파주시는 지난 13일 외국인 공공근로자를 위한 거점센터를 열었다. 공무원 관사를 리모델링한 센터는 외국인 근로자 40명이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현재 캄보디아에서 온 계절근로자 25명이 입주했고, 연내 15명을 추가로 입소시킬 계획이다. 경기 연천군은 농촌체험관광객에게 제공하던 숙소를 기숙사로 구조변경하고 외국인 계절근로자 20명에게 제공했다.
전북도는 75억원을 투입해 정읍시와 고창군, 임실군, 진안군, 순창군 등 5개 시·군에 외국인 근로자 전용 기숙사 건립을 추진 중이다. 기숙사 1곳당 40~50명을 수용한다. 강원도는 노인인구 감소에 따라 폐쇄된 경로당을 활용해 외국인 계절근로자 숙소로 이용하는 방안을 내놨다. 올해는 우선 화천군에서 3곳을 시범적으로 운영할 방침이다.
정부도 지자체와 발을 맞추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연내에 전국에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숙소를 10곳 보급하고, 2026년까지 20곳으로 늘릴 계획이다.
◆일자리 연계하고 한국어 교육·정착 지원
외국인 근로자들이 각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다양한 정책도 시행 중이다. 미취업 상태인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취업박람회를 열어 지역 기업의 인력난 해소를 돕는 ‘외국인 일자리 박람회’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부산시가 박람회를 열고 외국인 근로자 300여명에게 일자리를 연계해줬고, 올해는 충북도가 행사를 개최한다.
강원도의 경우 지난해 말 외국인정책팀을 신설하고, 18개 시군과 협력해 외국인 근로자의 정착을 지원하는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도 관계자는 “외국인 근로자의 안정적 정착을 위해 한국어 교육, 지역문화 체험, 고충 상담 등 다양한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며 “지원을 꾸준히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 유치를 위해 동남아 국가들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2015년 전국 최초로 외국인 계절근로자 제도를 도입한 충북 음성군은 최근 몽골·캄보디아·라오스 등에 공무원을 보내 계절근로자 파견인원 확대 합의를 이끌어냈다. 군은 이를 바탕으로 올해 계절근로자 500명 이상을 유치할 계획이다. 인근 괴산군 역시 필리핀과 계절근로자 증원을 골자로 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경북 상주시는 필리핀·라오스, 경남 거창군은 베트남, 전북 순창군은 베트남·라오스·필리핀 등과 연달아 업무협약을 하면서 계절근로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전국 최대 규모인 1200명에 달하는 외국인 계절근로자를 받아들일 예정인 강원 홍천군은 올해 초 필리핀 현지에서 면접을 실시했다.
◆마약·불법체류… 외국인 범법행위 근절 해결 과제
국내 외국인 근로자 급증에 따른 부작용 해소는 해결 과제다. 대표적인 문제가 마약으로 인한 범죄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외국인이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사례는 2120건으로 5년 전인 2018년(673건)보다 3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12월 충북 진천군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태국 국적의 20대 불법체류자가 향정신성의약품인 야바를 투약한 뒤 경찰에 도와달라고 신고하고는 집에 불을 질렀다. 그는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출동한 경찰관에게 흉기를 휘둘렀고, 경찰 한 명이 다쳤다.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과 방화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 불법체류자는 최근 법원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지난달엔 태국에서 국내로 마약을 밀반입해 외국인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유통시킨 태국인 마약사범 70명이 대거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불법체류자 문제도 심각하다. 법무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불법체류 외국인은 42만명을 넘어섰다. 합법적으로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 52만명에 근접한 수준이다. 국내 체류기간이 만료된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잠적하는 외국인 근로자도 있지만, 스스로 불법체류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나라살림연구소는 2022년 한 해에만 지정된 근무지를 이탈해 불법체류자가 된 외국인 계절근로자가 1151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했다. 같은 해 입국한 전체 계절근로자 1만630명의 10%에 해당한다. 대부분 돈 때문이다. 강원지역 한 농가 관계자는 “계절근로자의 경우 브로커에게 소개비 명목으로 돈을 건네면 남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라며 “잠적한 뒤 외국인 남성들은 주로 건설현장으로 일하러 가고, 여성들은 노래방 같은 유흥업소에서 일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외국인 정책을 종합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양철 강원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외국인 근로자 관리·지원 업무는 법무부, 고용노동부 등 여러 부처에 분산돼 있다”며 “장기적이고 체계적·통합적인 정책 수립과 추진이 어려운 구조”라고 했다. 그는 “외국인 근로자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이민자격 특례 신설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외국인 정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출입국·이민관리청(이민청)’ 설립 관련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국민의힘 정점식 의원은 “이민청이 출입국·이민정책의 컨트롤타워로, 통일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