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었다. 헤어짐을 통보하자 A씨는 그로부터 세 차례 성폭행과 한 차례 유사 강간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전 남자친구는 A씨의 주민등록증과 성폭행 장면을 휴대폰으로 촬영해 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지인들에게 유포하겠다며 협박했다. 전 남자친구는 이로 인해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A씨는 “그가 출소 후에 나를 찾아와 위해를 가할까 두렵다”며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신청했다.
해마다 주민번호를 변경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2018년 이후 지난 5년 사이 3.5배 폭증했다. 날로 교묘해지는 보이스피싱, 해킹과 함께 최근 ‘의대생 살인사건’과 같은 교제폭력으로부터 안전과 생명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피해자들이 늘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평가다.
16일 행정안전부 주민등록번호변경위원회에 따르면 2017년 6월부터 지난해까지 접수된 주민번호변경 신청 건수는 7960건이었다. 연도별로는 2017년 799건, 2018년 560건, 2019년 641건, 2020년 1127건, 2021년 1344건, 2022년 1547건, 2023년 1942건이다. 전체 변경 신청 건수 중 인용이 결정돼 새로운 주민번호를 받은 경우는 5361건으로, 인용률은 67% 수준이었다.
탈북민 등 제한된 대상만 할 수 있던 주민번호 변경이 제도적으로 가능해진 시점은 2017년 6월부터다. 2014년 신용카드 3사에서 1억 건이 넘는 고객 개인정보를 유출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주민번호 13자리 중 생년월일 여섯 자리, 성별 한 자리를 제외한 뒷번호 6자리를 바꿔 새로운 주민번호를 만들어낸다.
신청자가 주민번호 변경을 요청할 수 있는 사유는 재산상의 이유, 생명·신체상 이유로 구분된다. 전체 신청 건수 중 재산상의 이유가 6442건, 생명·신체상 이유가 1518건이었다. 재산상 이유에선 보이스피싱(4159건)이 전체 건수의 50% 이상을 차지했다. 이어 신분도용 943건, 기타(사기, 해킹 등) 1340건이 있었다. 생명·신체상 이유로는 가정폭력(742건)이 가장 주된 원인이었으며 상해·협박 408건, 성폭력 217건, 기타(명예훼손, 학교폭력 등) 151건 순이었다. 아직 법적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 데이트폭력의 경우 생명·신체 피해 유형에서 세부적으로 나뉜다.
교제폭력이나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주민번호 유출은 2차 피해를 유발할 수 있어 치명적이다. 상대방 주민번호를 알면 주소와 연락처 등 기본적인 신상정보를 쉽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번호변경위가 접수한 신청 사례에서도 이 같은 일은 비일비재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B씨는 전 남편을 경찰에 신고했다. 전 남편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출소 후 가족들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보복범죄를 당할까 두려워 주민번호를 바꿨다. 4년 넘게 사귄 전 남자친구로부터 스토킹 피해를 보던 C씨도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주민번호 변경을 선택했다.
정부는 올해 생명이나 신체 위해, 위해 발생 가능성이 커 주민번호 변경의 중대성, 시급성이 인정되면 주민등록 변경 심사·의결 기간을 기존 90일 이내에서 45일 이내로 줄이기도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주민번호 변경 심사를 철저히 해 악용을 막아야 하지만, 시민들의 삶을 돕는 측면에서 보다 유연하게 제도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