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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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 재일동포 허미미의 값진 금메달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너희가 어찌 원수가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일시에 진멸(盡滅)코자 하노라.” 3·1운동 한 해 전인 1918년 8월 어느 날 경북 군위군의 한 도로 부근 암벽에 붙은 격문 내용의 일부다. ‘너희’는 조선의 국권을 강탈해 식민지배를 하던 일제를 가리킨다. ‘진멸’이란 무찔러 모조리 없앤다는 뜻이다. 격문에는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 “나라 잃은 백성이라 어찌 아픈 노릇이 아니겠는가” 등의 구절도 있었다.

 

한국 여자 유도 국가대표 선수 허미미(경북체육회)가 지난 21일 세계 유도 선수권 여자 57kg급 결승전에서 우승한 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허미미는 독립운동가 허석(1857∼1920) 선생의 5대손이다. 대한유도회 제공

일제 경찰은 조선 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벌인 일이라고 판단했다. 곧 군위군 주민들을 상대로 색출 작업에 들어갔다. 폐쇄회로(CC)TV도, 유전자(DNA) 감식도 없던 시절이니 경찰 수사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해를 넘긴 1919년 2월 허석(許碩)이란 이름의 평범한 농민이 경찰에 체포됐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1857년생인 허 선생은 당시 61세의 고령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망국의 한을 품어 온 선생은 동포들에게 일제의 침략상을 널리 알리고자 격문을 써 암벽에 붙였다고 한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선생에게 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1919년 5월 1심 법원은 징역 1년 실형을 선고했다. 3·1운동 직후였던 만큼 선생이 수감생활 내내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지 짐작이 간다. 이듬해인 1920년 4월 만기 출소한 선생은 불과 이틀 만에 순국하고 말았다. 60여년이 지난 1982년 당시 전두환정부는 선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이어 노태우정부 시절이던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오늘날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수리에 선생의 공을 기리고 순국을 추모하는 기적비(紀蹟碑)가 세워져 있다.

 

21일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열린 세계 유도 선수권 여자 57kg급 결승전에서 허미미(22)가 우승했다. 한국 여자 유도 선수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29년 만의 일이다. 그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허미미가 허석 선생의 5대손이란 점이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이중국적자였던 허미미는 2021년 일본 국적을 포기했다. 같은 해 타계한 할머니가 ‘한국 국가대표로 선수 생활을 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늘에 있는 허석 선생도 허미미의 선전에 기뻐하며 ‘대∼한민국’을 외쳤을 것만 같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