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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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신경림을 애도하고 벌써 그리워하는가…“좋은 시뿐만 아니라, 선한 인간” [김용출의 이슈의 맥]

“시인이란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입니다. 잠수함이 해저에 있을 때 산소가 부족하면 토끼는 죽고 맙니다. 세상이 각박할 때 못 견디겠다고 저항하는 게 시인입니다.”

 

최근 작고한 신경림 시인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13년 3월16일 ‘담양 생오지 창작대학’ 개강일에 특강을 와서 이 같이 말했다고, 시를 쓰는 ‘차숙’(필명)씨는 지난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신 시인의 사진과 함께 당시 기사를 올렸다. 신 시인은 당시 특강에서 자신의 시적 경향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를 농촌 출신 시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현실에 뿌리박은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현실 속에서 체득된 감성을 서정적으로 노래한다고나 할까요. 평생 시를 쓰며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시를 쓰며 살 생각입니다.”

시인 신경림. /이제원기자

지난 22일 우리 곁을 떠난 신경림 시인을 회고하고 애도하는 글들이 페이스북을 비롯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메우고 있다. 거의 모든 글들이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와 함께 잔잔한 인연이나 기억도 함께 올리면서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시인 신경림을 애도하고 벌써부터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지금 현재가 힘들고 고달프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의 주옥 같은 시와 함께, 시뿐만 아니라 인품으로도, 그러니까 한 인간으로도 선한 영향을 남긴 “문단의 거목”(곽효환 시인 및 한국문학번역원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신 시인을 추모하는 글을 소개한다.

 

◆“가장 순수 인간적” “물 말은 밥에 짠지 같은 시”⋯이어지는 추모글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자신의 나이 서른 일곱이던 1997년 월간 ‘참여사회’에서 인터뷰할 때 예순 하나의 신 시인을 처음 만났다며 “이제까지 만났던 적지 않은 예술가들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인간적인 분이셨다”고 평한 뒤 당시 인터뷰 전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평범한 삶이 가장 어려웠다”는 그의 말이 인상적이다.

 

“다른 시인과 마찬가지로 뭐 특별히 계획된 삶도 아니었고 또 특별히 남들보다 더 어려운 삶도 아니었어요. 그냥 다른 한국 시인이 살아온 삶과 비슷한 것이었겠죠. 그 시대의 가장 예민한 부분에 대해 둔감해선 문학이라는 걸 할 수가 없으니까, 어떤 시대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달까, 그런 부분은 있겠죠. 또 하나 우리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평범한 삶이 가장 어려운 삶이었죠. 어려운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나름의 정서가 생겼을 테고 그 정서를 시로 표현하다 보니까 나 같은 시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특별히 내가 의식을 해서, 이런 시를 써야겠다, 이런 삶을 살아야겠다, 이런 건 없었어요. 다만 정직하게 내가 겪은 시대도 반영하고 내가 살아온 정서도 시에 반영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시인인 서홍관 국립암센터 원장은 페이스북에 신 시인이 생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두 번이나 맡게 된 경위와 기억을 다감하게 들려준다. “신 선생님이 작가회의 이사장을 하시고 그만 두신 몇 년 뒤였습니다. 이사장을 하겠다고 나서는 인물들이 있었고, 비토그룹이 있어 파벌간에 갈등이 심각했나 봅니다. 도저히 해법이 없으니 누가 신경림 선생님을 다시 추대하자고 했나봅니다. 누구도 반대를 안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이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때 만났더니 ‘아, 폐품 재활용하자는 거야’ 하면서 웃으십니다. 문단이건 어디건 신경림 선생님에 대해 욕하는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최영미 시인은 “신경림 선생님은 정직하고 선량하고 욕심이 없는 분이었다. ‘정직’을 나는 가장 높이 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맑은 동심을 간직했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눈을 가졌던 시인”이라고 적었다. 이잠 시인도 “등단도 못 한 시 쓰는 젊은이들을 홀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항상 친구 대하듯 존중해 주셨다”며 “대화에는 막힘이 없으셨고 세를 불리지 않으셨다”고 추모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신 시인의 시편들을 “물 말은 밥에 짠지 같은 시”라고 평하고 “혹독한 겨울, 우리는 신 시인의 시를 먹고 삶을 살아내며 고난을 버텼다”고 회고했다. “신고(辛苦)의 삶이었습니다. 군화 신은 이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시인은 사람 이야기를 썼습니다. 삶을 질박하게 노래했습니다. 천상의 언어나 악마의 절규가 아니라, 내 형제자매와 우리 부모님이 밥상머리에서 하는 말로 시집을 채웠습니다. 물 말은 밥에 짠지 같은 시입니다.”

 

◆「농무」를 노래한 서정적 민중시인, 하늘의 별이 되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농무」 부문)

 

시 「농무」를 비롯해 「갈대」, 「목계장터」, 「가난한 사랑 노래」 등 서정적인 민중시를 창작해온 한국 시단의 원로 신경림 시인이 22일 오전 암 투병 중이던 경기 고양시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별세했다. 향년 89세. 본명은 응식.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한국전쟁은 민족뿐만 아니라 중학생인 응식에게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응식은 한동안 전쟁의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충주고에 진학한 뒤에는 학과 공부보다는 문학 독서에 빠졌다. 충주에서 일찍이 개화한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해맑게 자란 그였고, 이미 도교육위원회 주최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하는 등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재를 발휘했던 그였다.

 

문학에 빠진 그는 자연스럽게 동서양 문학 고전은 물론 한국 전통시와 함께 백석, 임화, 이용악등 월북 및 납북 문인들의 시로 이끌었다. 1955년 동국대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독서회에 가담해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이념 서적을 읽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갈대」 전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국대 입학 이듬해인 1956년 잡지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의 작품이 추천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건강이 나빠져 낙향했고, 초등학교 교사를 비롯해 농사, 공사판 노동, 광산일 등 온갖 일을 경험하며 10년간 절필하기도 했다. 시인은 당시를 김호기 교수와 1997년 월간 『참여사회』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0년대는 먹고 살기 힘들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반공주의밖에 없었고, 자유가 철저하게 억압당하던 시절이었죠. 그때 문단에 나왔는데, 전쟁이 끝난 지 불과 몇 년밖에 안 됐고, 길거리에 전쟁으로 상한 사람들, 전쟁통에 허물어진 집들 천지였어요. 그럼에도 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대한 자각이나 인식도 없이 그저 막연한 소리, 존재니 실존이니 이따위 소리나 하고 앉았었지요. 거기에 대해, 과연 이렇게 시를 쓰는 게 옳은 것인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면서 시를 못 쓰게 됐죠. 당시에 함께 공부하던 패거리 중에서 한 친구가 문제가 생겨서 구속되는 바람에 겁도 먹었구요. 또 등록금을 계속해서 내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경제적인 형편도 안 됐고, 학교에 다녀야 할 의미도 있는 것 같지 않고, 서울 살기도 힘들고 해서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도 지어보고, 장사도 해보고, 학원강사와 가정교사도 해보고, 금광에 가서 일도 거들어보고, 공사판에 가서 잔돈푼도 벌고 그러다보니 10년이 금방 지나가버렸어요.”

 

등단 직후 10년의 절필은 그에게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저 역시 농촌 출신이라 농사도 지어보고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 전까지 뭐 뚜렷한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사실은 농촌 사는 사람들이 농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 10년 동안 이것저것 하고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됐으니까, 저로서는 민중을 발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죠.”

 

충주읍내에서 만난 김관식 시인의 조언에 따라서 1965년 상경해 다시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10년 만에 시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었다. 인터뷰에서 시인의 이어지는 회고이다.

 

“10년 동안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다시 시를 쓰고 문학을 하게 될 기회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옛날 같은 그런, 사는 것과 동떨어지고 현실하고 동떨어진 문학, 그런 말장난은 하지 말고 진짜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하면서 사는 사람들, 우리 현실이나 역사의 피해자들, 이런 사람들의 아픔까지 내 아픔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서울에 와서 다시 글을 쓰면서 쓴 시들이 바로 시집 『농무』에 실린 시들인데, 거기에 그 10년 동안 메모했거나 쓴 시가 몇 편 있어요.”

 

1973년 자비 출판 형식의 첫 시집 『농무』(1975년 창비시선 제1권으로 증보 출간)를 시작으로 반세기 넘는 동안 『새재』, 『달 넘세』, 『민요기행 1, 2』, 『남한강』, 『가난한 사랑노래』, 『길』, 『갈대』, 『낙타』 등 많은 시집을 발표했다. 『한국 현대시의 이해』,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등의 시론·평론집도 내놨다.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가난한 사랑 노래」 부문)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는 신세로 숨어서 치른 결혼식 주례를 서고 축시까지 낭독한 뒤 집으로 돌아와서 썼다는 시편 「가난한 사랑 노래」처럼, 시인은 민초들의 슬픔과 한, 굴곡진 애환을 질박하면서도 친근한 언어로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등 민중성과 서정성을 겸비한 시작 활동을 이어왔다. 시인인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창비 시선’ 1번인 『농무』는 우리 시단에서 민중시의 첫 장을 연 시집”이라며 “민중시의 장도 열었지만 서정성과 문학적인 길도 동시에 담보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신 시인은 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늘 시단과 문단의 자장 안에 서 있었고, 시대정신인 민주화 운동에도 헌신적이었다.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했고, 1984년 후배 유해정 등과 함께 민요연구회를 만들었으며, 199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상임의장, 동국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유가족으로 자녀 병진·병규·옥진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 장례는 그의 작품과 고인이 한국 현대시와 문단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해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25일 오전 5시30분. 장지는 충북 충주 노은면 선산. 시인을 기억하는 한, 그의 ‘농무’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농무」 부문)

 

※덧글=혹시 개인 SNS를 중심으로 의미 있는 이야기와 사연으로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는 글이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한, 그 역시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추모 글을 소개하는 기사가 계속 이어지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