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퇴근 무렵 서울 용산역 인근 삼겹살 전문점. 삼겹살에 와인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지인 말에 끌려 이곳을 찾았다. 이날 동행한 동생은 “술을 직접 가져올 수 있는 식당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삼겹살에 와인이 잘 어울린다”며 이같이 말했다.
가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크게 써 붙인 ‘콜키지 프리’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몇몇 테이블엔 와인과 위스키 병이 놓여 있었다. 자리를 잡고 직원에게 무료 콜키지 서비스를 요청하자 인원수대로 잔을 내어줬다.
이곳은 최근 늘고 있는 ‘콜키지 프리(Corkage-Free)’ 식당이다. 콜키지는 와인 마개를 뜻하는 ‘코르크’(cork)와 ‘charge(요금)’의 합성어로 손님이 직접 가져온 주류 반입이 가능한 곳을 일컫는다. 잔을 내어주고 서빙해주는 대가로 일정 비용을 청구하는데, 1병 당 1만원에서 3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반면 ‘콜키지 프리’ 식당은 비용 없이 잔을 제공한다. 최근 고물가에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콜키지 프리 식당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대학 동창 모임 중이라는 직장인 안모(33)씨는 “지난달 해외여행을 갔다가 좋아하는 위스키를 저렴하게 사왔다. 술 값도 아낄 수 있고 친구들에게 한 턱 쏘는 기분도 들어 더 즐겁다”고 말했다. 함께 온 전모 씨도 “다양한 주류를 가져와서 먹을 수 있어 추억이 될 것 같다. 앞으로 많은 인원이 모일 땐 콜키지 프리 식당 위주로 이용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 가볍게 즐기던 ‘서민 술’ 소주 가격도 6000원 육박
이 곳은 지난해 오픈 초기부터 콜키지 프리 서비스를 도입했다. 매장에서 판매하지 않는 와인 위스키 등 주류를 병 수 제한 없이 가지고 올 수 있다. 단, 콜키지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이용 시간이 2시간으로 제한된다.
식당 주인은 “오픈 때부터 콜키지 프리 서비스를 제공해 와인이나 위스키를 가져오는 손님이 많은 편이다”며 “와인 병 수 제한이 없는 대신 시간 제한을 뒀는데, 오히려 회전율이 빨라져 매출에서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콜키지 프리 서비스로 매출이 크게 늘지는 않아도, 고물가에 손님들이 더 만족할 수 있는 서비스는 맞는 것 같다. 단골 확보 차원에서 콜키지 프리 서비스를 고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평소 콜키지 프리 식당을 자주 이용한다는 직장인 황모(20대) 씨는 “요즘 새벽까지 취하게 먹는 또래 친구들은 잘 없다. 한 잔을 마셔도 원하는 술을 적당히 마시는 것을 선호한다”며 “요즘 식당 소주 한 병에 6000원 넘는 곳도 많은데 마트 와인을 사와서 즐길 수 있어 금전적으로도 이득이다”고 말했다.
과거 콜키지 서비스가 고급 와인과 위스키에 국한됐던 것과 달리 ‘서민 술’ 소주로도 확장하고 있다.
26일 오후 방문한 서울 강남구 KFC 압구정로데오점은 소주를 포함한 모든 주류 콜키지 서비스가 무료다. KFC는 지난 2월 이곳에 ‘버거 펍’ 형태의 매장을 오픈해 고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매장은 바 테이블과 붉은색 조명으로 꾸며져 마치 펍에 온 기분이 들었다.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넣어봤다. 치킨과 ‘콜키지 서비스’를 선택하니 직원이 잔을 내어줬다. 손님들은 삼삼오오 모여 가져온 캔맥주를 마시거나 하이볼을 즐기고 있었다.
매장 직원은 “오픈 때부터 콜키지 프리 서비스를 하고 있는데, 소주나 맥주를 사와서 모임을 하는 손님들이 많다”며 “근처 직장인들이 회식하러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포털사이트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콜키지 프리’ 식당을 추천해달라는 글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구글 맵에서 원하는 지역을 설정한 후 검색창에 ‘콜키지 프리’를 입력하자 수많은 식당 리스트가 검색됐다. 콜키지 프리 식당을 찾아주는 앱도 인기다.
이에 대해 허경옥 성신여대 소비자생활문화산업학과 교수는 “소비자 니즈가 다양해지면서 업계도 단골 유치를 위해 콜키지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는 추세”라며 “이미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와인 콜키지 식당이 인기를 끌고 있고, 고물가로 콜키지 프리 식당을 찾는 젊은층도 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정부 주세 인하에도…업주들 “주류 가격 낮추긴 어려워”
‘콜키지 프리’ 식당이 뜨고 있는 이유는 외식물가가 가파르게 치솟는 상황에서 서민 술 소주 가격마저 크게 뛰었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의 주세 인하로 주류 출고가는 소폭 내렸지만, 음식점에서 판매하는 소주 가격은 더 비싸졌다. 업주들이 주류 납품 가격 인하에도 고물가 시류에 편승해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다.
28일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4월 외식 물가 상승률은 3.0%로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 평균(2.9%)보다 0.1%포인트 높다. 이로써 외식 물가 상승률이 소비자물가 상승률 평균을 웃돈 현상이 2021년 6월부터 35개월째 이어졌다. 반면 가공식품 소주(-1.3%)와 밀가루(-2.2%), 라면(-5.1%), 김치(5.5%) 등 26개 품목은 물가가 내렸다.
국내 소주 제조사들은 올해 1월 1일 출고분부터 소주 출고가를 인하했다. 하이트진로는 ‘참이슬’과 ‘진로’의 출고가를 기존보다 10.6% 낮췄다. 롯데칠성음료도 ‘처음처럼’과 ‘새로’의 출고가를 이전 대비 각각 4.5%와 2.7% 인하했다.
그 사이 음식점 소주 가격은 계속 올랐다. 전년 동월 대비 올해 외식 소주 가격 상승률은 1월 4.8%, 2월 3.9%, 3월 1.9%로, 매월 올랐다. 5~6년 전만 해도 식당에서 3000원이면 즐기던 ‘서민 술’ 소주는 서울 지역 식당에선 평균 5000~6000원에 달한다. 물가가 비싼 강남이나 서울 중심가 술집은 6000~7000원에 육박한다.
업계는 그간 가파른 물가 상승과 인건비 부담에 가격을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외식 소주·맥주 가격은 전년보다 7.3%, 6.9% 상승했다. 오름폭은 각각 7년 만, 25년 만에 가장 컸다.
이는 2021년 시작된 소주·맥주 등 주류업체 ‘릴레이’ 출고 가격 인상 여파다. 하이트진로가 2022년 2월 참이슬 후레쉬 등 소주 제품 출고 가격을 평균 7.9% 인상했고, 다음 달 롯데칠성음료도 처음처럼 등 일부 소주 제품 출고 가격을 올렸다. 그해 3월 오비맥주가 카스와 한맥 제품의 출고 가격을 평균 7.7% 인상했고, 같은달 하이트진로도 테라·하이트 등 맥주의 출고 가격을 평균 7.7% 올렸다.
이에 재작년 국내 주류 출고금액은 10조원에 육박하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2022년도 주류산업정보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2년 국내 주류 출고금액은 전년 대비 12.9% 증가한 9조9703억원을 기록했다. 이보다 앞서 직전 최대 기록은 2015년(9조3616억원)이었다.
한 업주는 “그간 물가 상승으로 인한 재료값 부담과 인건비 압박에 주류 가격을 낮추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