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2일 새벽. 신경림 시인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유신독재 등 지난한 우리 현대사의 중심에서 평생 시를 쓰시고 시로 살아오신 시인이 돌아가셨다. 1935년 봄에 태어나 2024년 봄에 이 땅을 떠나셨다. 본명은 응식, 경림은 1955년부터 사용한 필명이다. 젊은 시절, 한창 시에 빠져 지낼 때 시인의 시집 ‘농무’를 읽었다. 그 시집엔 1970년대 농촌 생활은 물론 농부와 광부들, 일용직 근로자들의 모습이 현실감 있게 생생히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시집에서 시는 울음이며, 시 쓰기는 속으로 조용히 우는 것이란 걸 배웠다. 조용히(깊게) 울어야만 울음에도 내공이 쌓이고 그 내공이 시로 분출될 때 인간적 감흥을 일으켜 놀라운 섬광을 발한다는 걸 배웠다. 그러니 비록 가까이에서 자주 뵌 적은 없지만 분명 내 시의 스승이시니, 애도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어 장례식장엘 갔다. 가면서 시인의 시들을, 평소 좋아했던 시집을 떠올려 보았다.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사진관집 이층’ ‘뿔’ ‘낙타’ 등등.
평일 오후 4시쯤이라 장례식장은 생각보다 번잡하지 않았다. 대신 전국 각지에서 온 수많은 근조화환과 근조기가 시인이 얼마나 사랑받는 국민 시인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 시인이 걸어온 삶의 여정과 인품, 창작의 깊은 고뇌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며 환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어른 시인에 대한 존경과 상실감이 울컥 눈시울을 적셨다.
대부분 시인이 그렇듯 신경림 시인도 어릴 때부터 책을 아끼고 사랑했다. 도스토옙스키 전집 10권을 단숨에 읽고 투르게네프, 안톤 체호프 등을 탐독하며 문학에 눈을 뜨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시를 좋아해 백석, 이용악, 임화, 오장환, 정지용, 청록파 시인들의 시를 밤새 읽고 외우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백석 시는 시집이 아니라 대학생 잡지 ‘학풍’에 실린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읽고는 들고 있던 잡지를 떨어뜨릴 정도로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그 시를 다 외워버리고는 그때 결심했다고 한다. 내가 나중에 시를 쓰게 되면 백석처럼 시를 쓰겠다고.
1956년 ‘문학예술’을 통해 시인이 되신 신경림 시인은 어느 한때 한동안 시의 펜을 놓은 적 있지만, 평생을 민중 속에서 민중 속 고독이 아니라 민중이기에 고독할 수밖에 없고, 답답하고 고달플 수밖에 없는 원통한 민중의 삶을, 그들의 애환 섞인 희로애락을 솔직담백하게, 어떤 독단이나 술수 없이, 때로는 따뜻하고 비통하게, 때로는 처절하고 기막히게 아름다운 사랑으로 하나하나 시로 풀어내며 사셨다. 시에 우리 민요의 힘과 운율을 섞어 시로써 얼마든지 현실과 당당히 맞설 수 있음을 보여주셨고, 과거와 현재를 교묘하게 뒤섞어 초시간적 공간을 만들어 묵시록 같은 작금의 현실을 해맑고 선한 해학으로 녹여주셨다. 언제 어디에서 만나도 참 다정하시고 정직하셨던 시인이시여, 큰 시인이시여, 부디 안녕히 가세요.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상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