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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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한텐 “잊지 말아 달라”더니 대통령은 ‘물망초’ 외면

“우리가 대통령실 앞까지 오게 될 줄 몰랐습니다. 안 달거면 뭐하러 만들었습니까!”

 

29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통일부가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상징물인 ‘세송이물망초’를 만들기 전부터 물망초의 ‘나를 잊지 말아요’란 꽃말을 활용해 송환운동을 벌여온 민간 단체 활동가들 중 한 명이다.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가족 및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등 북한인권단체들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중정상회의에서 배지 미패용에 항의하고 있다. 김예진 기자

◆“윤석열 대통령에 실망” 

 

그는 “물망초 배지를 처음 만들 때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단 한번 국무회의 석상에서 달았을 뿐 그 이후 한번도 달지 않았다”며 “배지는 최고통치자로서 이 문제를 잊지 않겠다는 상징인데, 달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에 없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이번 한·일·중 정상회의에서 대통령이 물망초를 달지 않았다는 데서 여실히 드러났다”며 “공동선언문에 일본이 주장하는 납치자는 들어갔어도 납북자, 국군포로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가족 및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등 북한인권단체들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중정상회의에서 배지 미패용에 항의하고 있다. 김예진 기자

박 이사장은 “최고통치자의 넥타이 색깔 하나까지 많은 것을 상징하고 전 세계에 울림을 주는 법”이라며 “그렇게 달지 않을 거면 뭐하러 만들었느냐”고 했다. 이어 “오는 6월은 현충일이 있는 보훈의 달”이라며 “호국 헌신하신 영령들 앞에서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또 “대한민국 대통령은 적어도 외국 대표를 만날 땐 항상 가슴에 달고 반드시 우리 국민을 구하겠다는 의사를 전 세계에 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성용 전후납북피해자가족연합회 이사장도 회견에서 “2000년대부터 남북정상회담을 하며 비전향장기수를 북으로 돌려보낼 때 우리가 앞길을 막고 납북자·국군포로 1명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정부는 무시했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식에 우리를 초청하기에 ‘아 이제 좀 달라지겠구나’ 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좀 더 믿어보려 했던 윤 대통령까지 배지를 달지 않고 우리를 회피하는 광경을 본다”며 “피해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고 따졌다.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가족 및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등 북한인권단체들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중정상회의에서 배지 미패용에 항의하고 있다. 김예진 기자

그는 “앞으로 모든 정상회담에서 배지를 단다는 약속을 하라”며 “이제라도 배지를 못하게 한 담당 공무원을 즉각 파면하고 전 공무원들에게 공지해 물망초를 패용하고 의식적으로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해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외쳤다.

 

손명화 국군포로가족회 대표는 “배지를 만들었으면 그것을 효과적으로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 맞다”며 “윤석열 정부에서 배지를 만들어 그들을 잊지 않겠다기에 큰 기대를 했는데 너무 실망했다”고 했다.

 

◆‘세송이물망초’ 뭐길래?

 

‘세송이물망초’는 통일부가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송환을 기념하며 만든 상징물이다. 배지와 각종 용품으로 만들어 확산시킴으로써 국내외에 관심을 환기하겠다는 프로젝트다. 윤 대통령이 과거 통일부를 향해 “대북지원부 같았다”고 비난하고 통일부를 ‘대북 압박부서’로 체질 변화시키려는 기조 하에 대북 압박 소재로 활용하는 것이라는 시선도 있었지만, 통일부는 배지를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관심을 환기해 국제무대에서 국제사회와 협력해 문제 해결에 다가서려는 것이라고 설명해왔다. 일본 총리가 일본 납치자 문제 해결을 상징하는 ‘블루리본’을 패용하는 것과 비견되기도 했다.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가족 및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등 북한인권단체들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중정상회의에서 배지 미패용에 항의하고 있다. 김예진 기자

실제 영국 의회 의원들이 ’세송이물망초’ 배지를 패용하며 동조하는 등 성과도 있었다. 통일부의 김영호 장관과 당국자들은 공식행사나 기자회견, 브리핑 등 국민 앞에 나설 때마다 배지를 넉달째 상시 패용하고 있다. 배지패용 외에도 ‘세송이물망초’를 모티프로 한 의류 제작, ‘세송이물망초의 정원’이란 유리온실 설치작품 제작 등에 나서며 이슈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국무회의에서 한번 배지를 패용했을 뿐 이후 넉달간 어떠한 공식 행사에서도 배지를 패용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 왼쪽 가슴은 ‘세송이물망초’는커녕 태극기 배지도 없이 비어있는 채로 등장하기 일쑤다. 정치권에서는 대통령이 대외에 어떻게 노출되는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도 파다하다.

 

넉달간 대통령이 왜 배지를 패용하지 않는지 의아하다는 반응이 꾸준하던 가운데, 지난 20일 통일부 고위당국자는 27일 한·중·일 정상회의에 배지 패용을 대통령실에 건의하는 것은 어떤지 묻자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마침내 열린 27일 한·중·일 정상회의에서는 기시다 총리가 ‘블루리본’을 달고 나온 것과 달리, 윤 대통령은 배지를 또 달지 않고 나왔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최근 정례브리핑에서 대통령에게 배지 패용 건의를 했는지 등을 묻자 “내부 협의 과정에 대해서는 확인해 드릴 것이 없다”고 했다.

 

한 소식통은 “통일부는 건의했으나 대통령실 참모들이 반대해 착용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 실수나 누락, 무관심이 아닌 외교 의제로는 올리지 않는다는 기류라는 것이다.

 

이날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가족 단체들은 기자회견 후 윤 대통령 사진에 ‘세송이물망초’ 배지 모양 스티커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또 윤 대통령과 장호진 국가안보실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이충면 외교비서관, 전광삼 시민사회수석비서관 앞으로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항의 서한은 용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대통령실을 대신해 받았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