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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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 사망' 여부로 지급 갈리는 사망보험금…대법 "정신질환 진단 필수 아냐"

대법 “의사결정 못 하는 사정 인정”
유족 청구 기각한 원심 파기 환송

자살자 유족도 사망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을까? 법원은 사망 당시가 정신질환 등을 이유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던 때라면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해왔다. 대법원은 여기서 더 나아가 생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은 기록이 없어도 제반 사정을 고려해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놨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연합뉴스

◆자살 유족에 보험금 지급 거부한 보험사

 

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A씨 유족이 보험사 5곳을 상대로 낸 보험금 지급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지난달 9일 파기환송했다.

 

A씨는 2018년 2월 회사에서 업무를 마치고 귀가한 뒤 자택에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유족은 사망보험금 지급을 청구했지만 보험사들은 모두 거절했다. A씨의 사망은 보험 약관에서 면책사유로 정한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에 해당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족은 해당 약관에 예외로 규정된 ‘심신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A씨가 극도의 심리적 불안 상태를 이기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정신적 공황상태를 일으켜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의사결정’ 여부가 쟁점

 

유족은 보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심 법원은 유족 주장을 받아들여 보험사 5곳이 총 1억6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A씨가 순간적으로나마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와 달리 2심 법원은 A씨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다거나 상태가 악화해 사망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며 유족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A씨가 병원 진료나 진단을 받은 기록이 없고, 그가 의식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에 이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대법 “진단이력 없어도 제반 상황 따져야”

 

대법원은 다시 원심의 판단을 뒤집었다. “A씨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게 됐을 여지가 없지 않다”는 이유였다.

 

재판부는 A씨가 생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없더라도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경위와 제반 상황 등을 따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A씨가 사망 무렵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한 점, 사후 정신보건임상심리사도 A씨가 주요우울장애를 의심한 점 등을 짚었다.

 

재판부는 “자살에 이를 때까지의 경위, 사망한 사람이 남긴 말이나 기록, 주변인들의 진술 등 모든 자료를 토대로 사망한 사람의 정신적 심리 상황 등에 대한 의학적 견해를 확인하는 등의 방법으로 주요우울장애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에 이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생전 진단·진료 없어도 ‘심리적 부검’으로

 

그간 법원은 유사한 보험금 소송에서 자살자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를 따질 때 정신과 진료를 받거나 우울장애 진단을 받았는지를 주요 근거로 봤다.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국가대표 출신 최숙현 선수의 유족이 낸 보험금 소송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법 민사913단독(당시 이세창 부장판사)은 최 선수의 생전 정신과 진료 기록 등을 바탕으로 그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쳤다’고 봤다.

 

A씨의 경우처럼 정신 진료나 진단 기록이 없다면 의식·의도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증명이 부족해 보험금 청구가 기각되는 사례가 많았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자살 면책약관’의 예외가 적용되는 경우를 기존보다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전 정신질환 진단·진료가 없었더라도 ‘심리적 부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망인의 상태를 따질 수 있다고 본 판단은 향후 유사한 재판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