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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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님의 명예로운 희생… 훈장으로 재회하니 울컥” [밀착취재]

6·25참전용사 故 이형곤·영곤씨 동생 정곤씨

“7남매 중 4명이 전쟁에 나가
나도 베트남전 겪고 돌아와
손녀도 군인의 길… 만류 안해

형님들 무공훈장 대신 받으니
늦게라도 명예 찾게 돼 기뻐”

“처음으로 형님들이 전사하셨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6·25전쟁에서 산화한 두 형의 화랑무공훈장을 70년 만에 대신 받게 된 이정곤(81)씨는 현충일을 앞둔 5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어릴 때 형님들이 전쟁에 나갔다고 들었지만, 전쟁이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며 “어디에 모셨는지도 모르고 살아왔고 어떻게 돌아가신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6·25참전유공자의 가족이자 베트남전 참전유공자이기도 한 이정곤(81)씨가 5일 베트남 파병 당시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파주=이재문 기자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씨는 휴전선 아래 임진강 물줄기가 굽이치는 지역인 경기 파주시 적성면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지금까지 그는 두 차례 고향을 떠났다. 기억도 흐릿한 7살이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와 군에 입대한 다음 해인 1966년 베트남에 파병을 갔을 때가 전부다.

 

이씨의 형들은 6·25전쟁에 참전했다. 맏형인 고(故) 이형곤 이등상사는 1951년 3월 평창지구 전투에서, 셋째 형인 고 이영곤 일병은 같은 해 11월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금화지구는 철원·평강과 함께 ‘철의 삼각지’로 잘 알려진 6·25전쟁 기간 최대 격전지였다. 셋째 형인 이 일병의 유해는 수습됐지만 맏형인 이 이등상사의 유해는 찾지 못해 위패로만 봉안됐다. 차남 고 이만곤 상병만 만기 제대했다.

이씨는 다시는 겪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전쟁을 또다시 마주해야 했다. 군에 입대한 이후 베트남전 파병이 결정됐다. 이씨는 “내가 베트남으로 떠나던 날 부모님의 모습이 기억이 난다”며 “(부모님은) 형들이 떠났던 날을 떠올리시면서 자식새끼가 또 전쟁 나가서 죽는구나 생각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씨는 맹호부대(수도기계화보병사단) 26연대 소속으로 위험한 지역에서 전투를 하며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이씨는 “산 밑 논두렁에서 전투가 있었다. 논두렁 높이가 굉장히 낮아 조금만 일어서도 철모에 총알이 관통됐다”고 했다. 이씨 본인과 형들 모두 국가를 위해 싸운 참전유공자이지만 한 번도 자신의 집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저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살아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에는 모두가 전쟁을 겪었다. (각자 처한 상황에서 삶을 헤쳐나갔을 뿐) 무슨 명예로운 일이냐고 생각했다”고 했다.

국가 행사에 초청받은 적도 거의 없고 손녀도 공군 부사관으로 입대해 군인의 길을 걷고 있지만 특별한 조언이나 만류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참전유공자 집안’이라는 것을 처음 느꼈던 것은 지난달 육군 제25사단에서 열린 두 형의 화랑무공훈장 수여식 때다. 맏형 이 이등상사와 셋째 형인 이 일병은 전사 후 모두 화랑무공훈장 수여가 결정됐으나 긴박한 전쟁 상황으로 인해 ‘가(假) 수여증’만 부여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지난해 11월, 6·25전쟁무공훈장찾아주기조사단의 확인 과정에서 이 이등상사의 ‘제적등본’(현 가족관계증명서) 기록을 찾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유가족인 이씨에게 대리 수여를 할 수 있게 됐다.

 

이씨는 “군에서 늦게라도 형님들의 명예를 찾아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하다”면서도 “두 형님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히려 무공훈장보다도 살아서 돌아와 주셨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파주=구현모 기자 lil@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