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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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술’의 기억 [설왕설래]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 오십 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후략)’. 천상병의 시 ‘비 오는 날’에 등장하는 술예찬론이다. 시인 손민익은 ‘잔술 한 잔’이라는 시까지 낸 잔술 예찬론자다. ‘한 잔 하시게/ 또 한 잔 하시게/ 천원짜리 한 장 놓고/또 잔술 한 잔 하시게/그대 이지러진 달빛이 둥근 술잔 속에 스며들면은 한 잔 하시게/또 한 잔 하시게(후략)’

 

사진=마이크로소프트 디자이너의 AI 이미지 크리에이터 제공

통상 술은 병 단위로 주문하지만, 1980~90년대까지는 ‘잔술 문화’가 남아 있었다. 소주나 막걸리 등 서민이 즐겨찾는 주류가 대상이었다. 잔술은 고달픈 삶의 대명사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잔술을 파는 일이 보편적이었고, 잔술만을 취급하는 프랜차이즈 업체가 성업하기도 했다. 

 

잔술에 담긴 의미는 ‘배려’다. 파는 사람보다 마시는 사람의 주머니 사정을 먼저 생각한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뒤에서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은퇴한 중장년층이 즐겨찾는 ‘핫플’로 유명하다. 그 중 한 곳인 ‘부자촌’은 소주와 막걸리가 한 잔에 1000원이다. 빈대떡, 단무지 등 넉넉한 인심은 덤이다. 하지만 천정부지로 오르는 물가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소주는 예전 커다란 종이잔에서 작은 스테인리스 잔으로 바뀌었다. 손바닥 만했던 막걸리 잔도 3분의1 크기로 작아졌다.

 

정부가 ‘주류 면허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공포하면서 지난달 28일부터 술을 병이 아닌 잔으로 판매하는 잔술 판매가 모든 주류에서 허용됐다. 과거 주세법은 병이나 캔에 담긴 술을 임의로 가공·조작하는 걸 금지했다. 병이나 캔 형태 그대로 팔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다만 주류에 탄산이나 다른 주류를 섞는 행위나 맥주를 빈 용기에 담는 행위만 예외로 했다. 그러나 위스키나 와인, 소주, 막걸리, 사케 등의 잔술 판매는 명확히 규정되지 않아 법과 실생활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 정부가 뒤늦게 술을 잔에 나눠 파는 행위를 주류 판매업 면허 취소의 예외 사유로 인정한 것이다.

 

고급 위스키나 와인이 아닌 소주나 막걸리를 잔술로 주문하는 모습은 여전히 낯설다. 궁색해 보이는 게 싫어서일 수 있다. 병을 여닫아 보관하니 무언가 꺼림직한 마음도 숨길 수 없다. 잔술이 소비자 선택권을 넓히고 과도한 음주를 줄이는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김기동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