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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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의 시인 고 신경림 “어허 달구 어허 달구 한 세월 장똘뱅이로 살았구나”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 해, 읍내 책방에서 잡지 『학풍』을 뒤적이던 중학생의 눈길이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놀라서 책을 떨어뜨릴 정도로 전율했다. 중학생 신응식의 영혼을 뒤흔든 것은 바로 백석의 명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었다. 아, 시란 이런 것이로구나.

신경림 시인. 사진=이제원기자

얼마 전 구독하던 잡지를 통해 백석의 시 「오리 망아지 토끼」와 「여우난골」, 「비」를 접하고 백석이 좋아졌고, 또 그 몇 해 전 초등학교 시절엔 공책에 쓴 목계나루 단상이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친구들의 주목을 받던 그였다. 곧바로 잡지를 구입했고, 나중에는 백석의 시집 『사슴』을 구해 읽었다.

 

“나는 아직도 『사슴』을 처음 읽던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저녁밥도 반사발 밖에 먹지 못했으며 밤도 꼬박 새웠다. 그 뒤 『사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꺼내 읽고는 했으니, 실상 그것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가 되었던 셈이다.”(『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56~258쪽)

 

충주사범 병설 중학교 3학년생 신응식은 마침 이때 젊고 패기만만한 교사 정춘용과 인연을 쌓아가고 있었다. 담임교사이자 문예반 지도교사였던 정춘용은 그에게 시적 재능을 발견하고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좋은 책을 소개해줬고, 자신의 책을 빌려주기도 했으며, 인생과 시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중학생 신응식에게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추억이 담긴 광산도 폐쇄됐고, 광부로 일하던 삼촌은 보도연맹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동안 전쟁의 악몽에 시달렸지만, 살기 위해 한동안 피난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석 공부...“산다는 건 속으로 우는 것” 「갈대」로 등단

 

고교 시절 학과 공부보다 문학에 더 열심이었다. 대한교육연합회 주최 중고 문학콩쿨 대회에 참가해 산문 부문에서 당선됐고, 교지에는 평론 「이형기론」을 발표했다. 특히 고교 3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입시공부 대신 일어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독파했고 백석과 이용악, 오장환 등의 시집을 읽느라 밤을 새우곤 했다.

 

동국대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선배 유종호와 함께 하숙을 하는 한편, 독서회에 가담해 다양한 책을 읽었다. 1956년 늦가을, 이한직 시인의 추천으로 잡지 『문학예술』에 실존주의적 경향이 짙은 「갈대」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신인 신경림의 탄생이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갈대」 전문)

 

등단작 「갈대」는 인간 존재의 비극적인 생명 인식을 갈대의 울음을 통해서 형상화한 것이라고, 그는 나중에 밝혔다. “내 고향 마을 뒤에는 보련산이라는 해발 8백여 미터의 산이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나무꾼을 쫓아 몇 번 그 꼭대기까지 오른 적이 있다. 산정은 몇 만 평이나 됨직한 널따란 고원이었다. 그 고원은 내 키를 훨씬 넘는 갈대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에 갈대들은 온몸을 떨며 울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갈대들의 울음에서 나는 사람이 사는 일의 설움 같은 것을 느끼곤 했었다. 이 「갈대」는 이때의 산정 고원에서의 느낌을 시로 옮긴 것이다.”(『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314쪽)

●등단 직후 돌연한 귀향과 절필...민중을 보다

 

“글을 쓰지 않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지난달 작고한 신경림 시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글을 쓰고 싶어 했다고, 가족과 지인들은 전했다. 신 시인의 생전 인터뷰나 글, 관련 논문 등을 통해서 시인의 삶과 시 세계를 재조명한다.

 

1935년 충주에서 면서기를 한 아버지 신태하와 어머니 연인숙 사이의 4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신경림은 대학 2학년 때인 1956년 잡지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등단한 이듬해 봄, 그는 낙향한 뒤 10년간 절필했다. 아버지가 장사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운데다가, 기성 문단에 대한 실망도 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때 상황을 그는 김호기 교수와 1997년 월간 『참여사회』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19)50년대는 먹고 살기 힘들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반공주의밖에 없었고, 자유가 철저하게 억압당하던 시절이었죠. 그때 문단에 나왔는데, 전쟁이 끝난 지 불과 몇 년밖에 안 됐고, 길거리에 전쟁으로 상한 사람들, 전쟁통에 허물어진 집들 천지였어요. 그럼에도 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대한 자각이나 인식도 없이 그저 막연한 소리, 존재니 실존이니 이따위 소리나 하고 앉았었지요. 거기에 대해, 과연 이렇게 시를 쓰는 게 옳은 것인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면서 시를 못 쓰게 됐죠. 당시에 함께 공부하던 패거리 중에서 한 친구가 문제가 생겨서 구속되는 바람에 겁도 먹었구요. 또 등록금을 계속해서 내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경제적인 형편도 안 됐고, 학교에 다녀야 할 의미도 있는 것 같지 않고, 서울 살기도 힘들고 해서....”

 

그는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고, 장사도 했으며, 공사판이나 광산일을 거들기도 했다. 갖가지 이력과 경력이 추가됐다. 농부, 광부, 장사꾼, 공사장 인부, 학원 강사, 학교 강사.... 이렇게 세상 속에서 뒹군 10년은 나중에 그의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 된다. 바로 민중을 발견한 것이다.

 

“1956년부터 1965년에 이르는 기간 시골에 가서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고, 친구가 경영하는 광산에 가서 기생하기도 하고, 공사장 같은 곳에 잠시지만 붙어살기도 했습니다. 내 시를 가르켜 농민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데, 그러나 나는 농민문제나 농촌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시를 쓴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오고 나의 정서의 바탕을 이루는 곳이 바로 농촌이고 또 농민들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시를 쓰다 보면 자연히 거기에 관심을 갔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농촌 농민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시 속에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농촌적 정서가 내 시의 바탕이 되다 보니 자연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진 시로 되지 않을 수 없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긴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고 생활한 적도 실제로 있습니다.”(신경림 김사인, 1986년 봄, 「신경림의 시세계와 한국시의 미래(대담)」, 『오늘의책』, 17~18쪽)

 

그는 “10년 동안 이것저것 하고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됐으니까, 저로선 민중을 발견한 시기였다”며 “만약에 기회가 생긴다면 옛날처럼 사는 것과 동떨어지고 현실하고 동떨어진 문학, 말장난은 하지 않고 진짜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하면서 사는 사람들, 현실이나 역사의 피해자 아픔까지 내 아픔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 역사적 시집 『농무』 출간...“한국 민중시의 첫 장” 

 

1965년 충주 읍내에서 조우한 김관식 시인의 권유로 함께 상경해 김 시인의 홍은동 집에 얹혀 살면서 다시 시를 쓰게 된다. 그해 잡지 『여상』에 「산읍일지」를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개한 그는 유종호의 소개로 1970년 『창작과비평』에 「파장」과 「산일번지」, 「농무」, 「전야」 등을 발표했다.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농무」 부문)

 

그는 1970년 전후 「농무」를 비롯해 이야기 요소를 도입해 농촌 현실을 반영하는 시 세계를 형성했다. 특히 이 시기 시편을 모은 시집 『농무』는 1973년 자비 출판 형식의 처음 출간됐다가, 이듬해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뒤, 1975년 창비시선 제1권으로 증보 출간됐다. 『농무』의 신화가 쏘아올려진 순간이었다. 염무웅은 “참된 민중시, 진정한 현대시를 지향하는 전환기에 있어서 하나의 결정적 이정표”(1979 여름, 「시에 있어서 정직성」, 『창작과비평』)라고 격찬했고, 곽효환 역시 “‘창비 시선’ 1번인 『농무』는 우리 시단에서 민중시의 첫 장을 연 시집”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농무』를 시작으로 반세기를 넘는 동안 시집 『새재』(1979), 『달 넘세』(1985), 『남한강』(1987), 『가난한 사랑노래』(1988), 『길』(1990), 『쓰러진 자의 꿈』(1993),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9), 『뿔』(2002), 『낙타』(2008), 『사진관집 이층』(2014) 등을 발표했다. 시론 및 평론집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우리 시의 이해』(1986) 등을, 산문집 『민요기행 1, 2』, 『강따랑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냈다.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시 혁신 위해 민요 찾아...「목계장터」 「가난한 사랑 노래」 탄생 

 

시인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전통 민요의 율격과 정서를 적극 수용한 시작 활동을 했다. 시집 『새재』와 『달넘세』, 『가난한 사랑 노래』, 『길』 등을 통해서 민중의 현실을 민요적 방식으로 형상화하려 시도했다. 1984년에는 후배 유해정 등과 함께 민요연구회를 조직했다.

 

그는 시 창작방식의 혁신 차원으로 민요 방식을 모색했는데, 이는 1976년 6월 단국대 강연 「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강연에서 “난해시가 생겨나는 가장 큰 원인은 민중적 바탕을 잃은 데 있는 까닭”이라면서 시가 다시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민요시의 가락을 살려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여기서 저는 구체적으로 시가 민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 시 속에 우리 고유의 민요적 가락을 되살리는 것이 어떻겠느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최근 여러 해 동안 졸시 「새재」를 쓰기 위해 자료를 모은다는 구실로 시골, 특히 남한강 일대를 여러 번 돌아다녔는데 강마을 어딜 가나 들을 수 있었던, 아직도 농민들 사이에 전승되어 오고 있는 민요가락처럼 저에게 감동을 준 것은 없었습니다. 결코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어떠한 현대문학 작품도 형상화하지 못했던, 이 민족의 한과 설움, 견딤과 참음, 끈질긴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습니다...이것을 시 속에 끌어들이는 것은 민요의 계승을, 발전을 위해서라기보다 시가 민중의 사랑을 되찾기 위하여 매우 시급한 일이라 여겨집니다.”(신경림, 1979.6,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이승훈 엮음, 『한국현대대표시론』, 태학사, 151~152쪽)

 

목계장터를 중심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민중의 삶을 4음보의 민요조로 노래한 대표시 「목계장터」의 창작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

 

“1975년 늦은 봄, 충주에 가까운 강촌엘 갔다가 1박하고 우리는 원주에서 충주행 버스를 타고 목계까지 왔다. 목계 길바닥에 주저앉아 두어 시간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나는 슬슬 나루터를 향해 나루터가 보이는 언덕까지 나가보았다. 근대적인 웅장한 다리가 놓여, 나루터는 이미 그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언덕에 선 책 옛 나루터까지 가볼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투망을 어깨에 맨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젊은이 둘이 노랫가락을 흥얼대며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실패한 내 두 편의 「목계장터」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실패작이 되고 만 까닭을 이내 깨달았다. 우리 고유의 가락-그것이 빠져 있어서는 목계장터는 결코 한편의 시로 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또 한 번 「목계장터」를 쓸 생각을 하게 되었다.”(『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307~311쪽)

 

그는 1974년 봄 경향신문에 「목계장터」를 처음 발표한 뒤, 대폭 수정해 『자유공론』에 다시 발표했으며, 이듬해 목계 장터에 우연히 젊은이 둘이 노랫가락을 흥얼대면서 언덕 위로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서 우리 가락이 빠진 것을 깨닫고 또다시 고쳐 써서 『엘레강스』에 세 번째로 발표했다며 「목계장터」를 세 번이나 썼다고 고백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목계장터」 부문)

 

어허 달구라는 리듬감이 살아 있는 「어허 달구」는 아내와 아버지, 할머니 세 사람의 한을 전통 민요인 구전 조가를 차용해 노래한 시편이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 바람이 세면 담 뒤에 숨고/ 물결이 거칠면 길을 옮겼다/ 꽃이 피던 날은 억울해 울다/ 재넘어 장터에서 종일 취했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사람이 산다는 일 잡초 같더라/ 밟히고 잘리고 짓뭉개졌다/ 한 철이 지나면 세상은 더 어두워/ 흙먼지 일어 온 하늘을 덮더라”(「어허 달구」 부분)

 

그는 시 「어허 달구」 창작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 4, 5년 사이 가장 가까운 이의 세 죽음을 겪었다. 먼저 아내가 죽었다. 그 4년 후에 할머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두 번씩이나 고향 사람들을 산역에 동원하게 된 일이 미안하고, 또 군말 없이 일해 주는 것이 고마워 이번에는 음식을 비교적 푸짐하게 마련했다. 전번의 상사 때와는 달리 문상객도 많았고, 봉분할 때 일꾼들은 신명을 내기까지 하며 「어허 달구」를 불러댔다. 할머님의 일생을 이 사람 저 사람이 되는 대로 주워섬기는 어허 달구는 이상하게 사람이 사는 일의 보편적인 한과 설음까지 획득하고 있어 내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돌아오는 영구차에서 나는 할머님과 아내의 죽음을 하나의 이미지로 담을 시를 쓸 생각을 했다. 채 1년도 되지 않아 중풍으로 앓아누우셨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역시 선영에 모셨는데, 이때 나는 상주 일보다 달구질하며 부르는 고향 사람의 「어허 달구」를 듣고 메모하는 데 더 신경을 썼다. 아버님의 죽음까지 겪은 며칠 뒤에 「어허 달구」는 완성되었다...「어허 달구」는 고향 사람들에게 구전되어 오는 조가를 정리하고 세련시킨 것이요, 거기에 아내와 할머니와 아버님의 한과 설움을 얹은 작품이다.”(『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83쪽)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가난한 사랑 노래」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던 노동운동가가 지하실 교회에서 치른 비공개 결혼식의 주례를 서고 축시까지 낭독한 뒤 집으로 돌아와서 쓴 시편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가난한 사랑 노래」 부문)

2-02

●연작 서사시 창작...민주화 운동 참여도

 

아울러 농민의 공동체 복원 투쟁을 형상화한 서사시 「새재」, 「남한강」, 「쇠무지벌」 3부작을 차례로 쓴 뒤 이를 묶은 연작 서사시집 『남한강』을 발표했다. 한일합방과 삼일운동, 해방 전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돌배와 연이, 다수 민중을 차례로 등장시켜 농민 공동체를 복원하려는 농민들의 투쟁을 민요적으로 노래했다.

 

“캥매캐갱 캥매캐갱 한바탕 놀아보세// 나무 풀 타는 가뭄 우리 탓이래/ 산짐승 모여 우는 것도 우리 탓이래/ 왜놈 청놈 모아다가 제상을 차려놓고/ 새파랗게 칼을 갈아 우리를 겨눴구나// 캥매캐갱 캥매캐갱 한바탕 뛰어보세”(『남한강』, 45쪽)

 

해당 대목은 농악기를 치면서 부르는 사서로, 돌배 일행이 왜 헌병에 쫓겨서 도망 가다가 새재에서 의병을 만나서 술판을 벌이고 노는 집단적 놀이 장면이다. 그는 자신의 서사시는 얘기와 노래를 섞으면서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반박수의 방법’을 활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고장에 흩어져 있는 많은 얘기와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다. 시를 쓰게 되면서 이 얘기와 노래를 시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내 꿈이었다. 얘기와 노래를 수용하자니 장시라는 형식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이 시를 구상하면서 나는 서사시라는 서구적 개념의 문학형식을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들은 것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게 가장 많은 얘기와 노래를 들려주었고 또 가장 감동적이었던 창돌애비라는 반박수의 방법을 크게 참작했다. 그는 얘기 속에 노래를 섞기도 하고 노래 속에 얘기를 섞기도 하면서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뛰어난 얘기꾼이요 노래꾼이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목대목 청중을 얘기꾼과 노래꾼으로 동원하는 방법이었다.”(신경림, 「책 앞에」, 『남한강』, 1987, 3쪽)

 

공광규(2004)는 박사학위논문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에서 “일제강점기 민중의 참담한 현실을 형상화한 「국경의 밤」과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형상화한 「금강」을 전통으로 하는 강한 역사의식이 발현되는 동일 계열의 서사시”라고 평가했다. 다만, 강정구(2003)는 박사학위논문 「신경림 시의 서사성 연구」에서 여러 장점에도 서사적 갈등이 전면에 부각하지 못했고, 역사적 사건을 대립과 투쟁의 관점에서만 살펴봤으며, 인물의 개성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시대정신이던 민주화 운동에도 헌신적이었다.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했고, 1992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상임의장, 동국대 석좌교수 등도 역임했다.

 

●마지막 내적 성찰 강화하며 새 서정시 모색

 

신경림은 1990년대 이후에는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서 내적 성찰을 지향하면서 다시 서정성을 강화했다. 시집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등을 발표했고, 최근에는 산문시의 경향도 보여줬다. 이 시기 대표작 「나목」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지식인의 내면 풍경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나목」 전문, 『쓰러진 자의 꿈』)

 

그는 마지막 시집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시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에서 자신의 시와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부분)

 

강정구는 논문에서 신경림의 시가 민중의 개념과 범위를 사회과학적인 인식에서 찾지 않고 현실에서 찾았고, 우리 문학사에서 민요와 무가 등 운문적 서사 전통을 수용하고 발전시켰으며, 해방 이후 근현대 시사에서 이야기 가인의 존재와 이야기를 분명하게 제시한 전범이 됐다는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분석했다. 공광규 역시 민요와 가요의 양식을 시에 적극적으로 수용해 서성시의 방법적 혁신을 이뤘고, 화자의 변화와 집단놀이를 대거 수용하는 등 서사시의 방법적 확장 역시 이뤘으며, 현실 반영의 방법도 확대했다고 평가했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한다. 한번은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죽고,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을 때 두 번째 죽는다. 비록 시인은 갔지만, 우리가 시인과 그의 노래를 기억하는 한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잔돌로, 바람으로, 노래로.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차라리 한 세월 장똘뱅이로 살았구나/ 저녁 햇살 서러운 파장 뒷골목/ 못 버린 미련이라 좌판을 거두고/ 이제 이 흙 속 죽음 되어 누웠다/ 어허 달구 어허 달구”(「어허 달구」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