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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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보류 권고 사도광산…日, 강제동원 제대로 설명할까 [일본 속 우리문화재]

◆사도광산 등재 노리는 日, 한국 정부와 무엇을 논의할까

 

“한국 정부와 정중히 논의하겠다.”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여부에 한국의 입장이 관건으로 떠올랐다. 유네스코 자문기구 이코모스(ICOMOS)가 등재 보류 권고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난 6일 이후부터다. 이코모스의 권고는 등재 여부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사도광산의 내부. 연합뉴스

권고의 핵심은 사도광산에서 채굴이 이뤄졌던 모든 시기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설명·전시 전략, 시설과 설비 등을 갖추라는 거다. 사도광산은 16∼19세기 전통 수공업으로 금을 생산한 곳으로 태평양전쟁 이후엔 구리, 아연 등 전쟁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활용됐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을 당했던 곳이다. 일본 정부는 대상 기간을 에도시기인 16∼19세기 중반으로 한정해 조선인 강제노역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시도 중이고, 우리 정부는 이를 지적하며 등재에 반대하고 있다. 이코모스의 보류 권고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수용해 일본 정부를 압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언급한 ‘정중한 논의’는 이코모스의 권고대로 강제노역 사실을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알릴 지를 두고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달 말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를 성공시키려는 일본 정부로서는 권고를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목적을 달성하려 하지 않을까 싶다. 이코모스가 사도광산의 문화재적 가치는 인정한 상황이라 이렇게만 하면 등재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등재 이후 약속 이행 여부다.  

 

‘군함도’란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하시마섬을 포함한 일본 각지 23개 현장으로 구성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철강·조선·석탄산업’(이하 ‘산업혁명유산’)이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당시 거의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군함도에 끌려온 조선인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노역을 했다는 점을 비판하며 한국 정부가 등재를 반대하자 일본 정부는 이렇게 약속했다.  

 

“‘각 현장의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우라’는 권고에 대해 신중이 대응할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은 1940년대 몇 곳의 현장에서 그 의사에 반해 엄혹한 환경 아래서 일했던 많은 조선반도(‘한반도’의 일본식 호칭) 출신자들이 있었다는 것, 또 제2차 대전 중 일본 정부가 징용정책을 실시했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를 강구할 생각이다. 일본은 정보센터의 설치 등 희생자를 기억에 남기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설명전략에 포함시킬 것이다.”

 

일본은 약속을 지켰을까.  

 

일본 도쿄 신주쿠구의 산업유산정보센터. 

◆이토가 이끈 일본 산업화 상징 군함도, 반성은 없다    

 

도쿄 신주쿠구 총무성 제2청사 별관 내에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있다. 산업혁명유산 등재 당시 일본 정부가 공언했던 ‘희생자를 기억에 남기기 위한 조치’의 핵심 시설이다. 산업혁명유산과 관련된 사료수집, 조사연구, 공보활동, 교육·연수 등의 중심인 이 곳의 메시지가 곧 산업혁명유산에 대한 일본의 태도다.

 

군함도를 소개하고 있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의 가이드북 표지. 산업유산정보센터 홈페이지

관람객을 처음 맞는 전시물 중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 일본 정부 초대 총리였던 이토는 젊은 시절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훗날 ‘산업 일본’을 처음 이끌었던 ‘조슈 파이브(5명)’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정보센터는 이토 등이 견인한 19세기 일본 산업화를 “세계사에 특필(特筆·특별히 두드러지게 기록하다)해야 할 사건”으로 규정한다. 산업혁명유산은 “우리나라(일본)의 중공업에서 일어난 큰 변화, 국가의 질을 변화시킨 반세기 산업화”의 증거다. ‘존(ZONE) 1·2·3’으로 나뉜 세 전시실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기조로 일관한다.  

 

한국에서 열렸던 군함도 관련 전시회를 관람 중인 강제노역 피해자. 연합뉴스

군함도의 강제노역과 관련된 내용은 존3(자료실)에 모아뒀다. 군함도에서 일하거나 살았던 사람들의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 군함도 생활을 보여주는 영상, 사진 자료, 월급 봉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정보센터는 강제노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1939년 공포된 ‘국민징용령’, 태평양전쟁 개시에 따라 부족해진 노동력을 메꾸기 위해 조선인 유입을 늘리기로 한 1942년 ‘조선인노무자활용에 관한 방책’ 각의(내각) 결정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억압과 차별, 폭행 등 강제노역과 관련된 부정적 측면은 찾아볼 수 없고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동등한 대우를 받은 ‘일본인의 동료’로 묘사된다. 군함도에서 탄광 내 측량 작업을 했던 한 일본인의 증언을 담은 전시물에는 “작업복이나 작업 도구 등에서 차별은 없었다. 조선인이기 때문에 하는 차별은 없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인, 일본인 노동자 간에) 연대감이 강했다. 조선인은 목숨을 의지한 동료”라는 증언도 소개하고 있다.  

 

부당한 대우가 없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가장 뚜렷한 것이 40여 장의 월급봉투다. 봉투 겉면에서 잔업수당, 가족수당, 야근수당이 표시되어 있다. “억압당했다는 인상을 없애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며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전시물도 눈에 띈다.   

 

정보센터에 반성은 없다. 급속한 산업화를 일궈낸 영광된 역사만이 있을 뿐이다. 전시물을 보면 당시 군함도는 엄혹한 세월을 함께 버텨낸 조선인, 일본인의 동료애로 충만한 공간이었나, 싶어진다. 유산의 전체 역사를 알려 반성을 요구한 것인데, 찬사의 드라마를 써놓았다.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할” 산업혁명유산에 그림자 따윈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고 약속하고 등재에 성공한다면 약속을 제대로 지킬까. 정보센터를 보면 ‘그럴 리 없다’는 대답이 떠오른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