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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보다 훨씬 후퇴한 한·러, 한·중 관계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4년 6월7일 김영삼(YS) 대통령이 러시아 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1990년 소련(현 러시아)과 수교하고 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YS는 귀국길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렀다. 러시아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찾아 러시아 해군의 주요 함정들을 둘러본 YS는 “이곳에서 한반도의 두만강까지는 지척지간인데도 한국 대통령이 여기까지 오는데 반세기가 걸렸다”며 “오늘로 한반도의 반세기 비극도 종결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한·러 관계 발전과 그에 따른 북한 입지 축소가 한반도 긴장 완화를 거쳐 결국 통일로 이어질 것이란 낙관론을 드러낸 셈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같은 날 중국 베이징에선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이 북한 인민군의 최광 총참모장과 만났다. 당시 북한은 핵무기 개발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며 한국, 미국은 물론 국제원자력기구(IAEA)와도 갈등을 빚고 있었다. 중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장 주석은 북한의 이런 행동이 한반도 긴장을 지나치게 고조시키는 점을 지적하며 자제를 당부했다. 장 주석은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안전’이 북핵 문제를 대하는 중국의 기본 입장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북한 최고 지도자인 김일성·김정일 부자에게 자신의 뜻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로부터 불과 1개월 만에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정권은 김정일에게 넘어갔다.

 

당시만 해도 북한을 바라보는 러시아와 중국의 태도는 곱지 않았다. 양국 모두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도에 우려를 표하며 군사적 모험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경제난을 극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중국도 서방과의 협력을 통해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고 세계 시장에 적극 진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들이 보기에 북한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고 차라리 한국이 더 쓸모 있는 파트너였다. YS의 낙관론도 바로 이 점에서 비롯한 것이다. 북한의 고립이 심화할수록 통일의 문은 활짝 열린다고 여겼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세계일보 자료사진

30년 만에 세상이 확 바뀌었다. 이웃나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전쟁에 쓸 포탄을 북한에서 공급받으며 군사적으로 북한과 밀착하고 있다. 지난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방러에 이어 연내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답방 차원에서 평양을 찾을 예정이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정상회의는 중국의 반대로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공동 선언에 명시하지 못한 채 끝났다. 30년 전만 해도 ‘한반도 비핵화가 중국의 기본 입장’이라던 것에서 훨씬 더 후퇴한 셈이다. 핵탄두와 미사일을 손에 쥔 북한의 도발 위협이 거센 가운데 북·중·러 결속은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 한반도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이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