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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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참전용사들의 마지막 여정

삶이 얼마 안 남은 참전용사들
전쟁기념비 보러 워싱턴 여행
무료 프로그램 통해 기억 새겨
미 정치권·국민들 예우 놀라워

2022년 10월 어느 날, 미국 워싱턴 로널드 레이건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탑승 게이트에서 안내방송이 나오고,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를 기다리던 승객들이 일제히 일어나더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게이트에서 노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누구는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왔고, 누군가는 지팡이를 짚었고, 또 휠체어를 탔다. 모자에 적힌 ‘베테랑’(Veteran) 문구를 보고 참전용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던 일반 시민들은 30분 넘게 이어지는 참전용사들의 행렬에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구 하나 빠짐없이 ‘신의 축복이 있기를’(God bless you), ‘감사합니다’(Thank you), ‘진짜 영웅’(Real hero)이라고 외쳤고, 일부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중년여성에게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잊지 못할 순간이다.

박영준 워싱턴 특파원

미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세계 2차 대전, 6·25전쟁,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에게 무료로 워싱턴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아너 플라이트(Honor flight)’ 프로그램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비영리단체 ‘아너 플라이트 네트워크’는 2005년부터 워싱턴 내셔널몰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기념비, 한국전 참전 기념비, 베트남전 참전 기념비 실제 주인공들에게 자신이 참전한 전쟁의 기념비를 볼 수 있게 하자는 취재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매년 약 2만2500명, 지난해까지 19년 동안 약 30만명이 넘는 참전용사들이 아너 플라이트를 통해 워싱턴을 방문했다고 한다. 아너 플라이트는 항공사의 지원과 일반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참전용사들의 ‘일생일대의 여행’을 위해 의사와 간호사, 자원봉사자들이 동행한다. 참전용사들이 각 지역에서 출발할 때, 워싱턴에 도착할 때 참전용사들을 향해서 일제히 박수와 환호가 쏟아진다. 참전용사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흐른다.

미국에서 참전용사에게 보내는 국가와 국민의 존경과 예우는 경험할 때마다 놀랍다.

지난 4월29일 찾은 미 연방의회 의사당 돔 아래 원형 홀 ‘로툰다’에는 공화당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하킴 제프리스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마크 밀리 전 합참의장, 데니스 맥도너 보훈부 장관 등 200여명이 모였다. 6·25전쟁 참전용사로 미국 최고 훈격인 명예 훈장을 수훈한 고 랠프 퍼켓 예비역 대령의 추도식에 미국 여야 지도부, 행정부 수장 등이 최고의 예우를 갖춘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문제, 국경과 경제 정책 등을 두고 민주당과 공화당, 공화당과 조 바이든 행정부가 극한의 대립을 하는 가운데서도 6·25 참전용사를 기리는 마음은 같았다. 존슨 하원의장은 “6·25전쟁 참전용사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도 옳은 일을 했다”며 “우리 모두가 존경하고 열망해야 할 본보기”라고 했다.

미국의 메모리얼데이(5월 마지막 주 월요일), 한국의 현충일 가운데인 6월1일, 메릴랜드주 헤이거스타운 한인교회에서 열린 6·25전쟁 참전용사 초청 오찬행사에는 12명의 6·25전쟁 참전용사가 참석했다. 기자가 2년 전에 방문했을 당시 참석했던 참전용사 8명이 참석하지 못했다. 한때 120명을 넘겼던 한국전 참전용사협회(KWVA) 312지부 회원은 35명으로 줄었다. 312지부는 5월에만 회원 2명의 장례식을 치렀다고 했다. 312지부를 이끌고 있는 참전용사 론 트웬티는 기자에게 “메릴랜드주에서는 312지부가 마지막 남은 지부이고, 모든 참전용사 지부가 문을 닫았다”면서 “내가 살아 있고, 회원이 한 명이라도 모임에 참석하는 한 지부 운영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미 보훈부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6·25전쟁 미국 참전용사 생존자는 78만3000여명으로, 2040년에는 4600여명, 2050년에는 10여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추산됐다. 이들의 마지막 여정을, 이들이 떠난 뒤의 빈자리를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박영준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