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이 다시 공개되면서 대중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상은 1997년 8월 서울 서초구 잠원동 뉴코아 스포츠센터 어학원 앞에서 영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박초롱초롱빛나리(당시 8세)양이 사라진 유괴사건이다.
1997년 8월, 대한민국은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신문과 TV는 나리 양을 찾기 위한 뉴스 기사로 도배되었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나서 ‘조속히 범인을 검거할 것’을 지시할 정도로 사건의 심각성이 커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리 양은 유괴된 지 14일 만에 한 지하실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얼굴과 눈에 청테이프가 붙어 있었고, 옷이 벗겨진 상태의 나리 양의 참담한 모습에 현장을 목격한 형사와 부검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끔찍한 범행의 주범은 만삭의 임산부 전현주였다. 만삭의 임산부가 범인이라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 사건 이후 유괴 예방 교육용 책자의 유괴범 삽화가 여성으로 묘사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내무부 고위 공직자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라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 작가를 꿈꾸던 전현주가 어쩌다 유괴 살해범이 되었을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전현주가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8개월의 임산부였던 전현주는 큰 돈을 얻을 방법은 유괴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현주는 당시 영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귀가하던 나리 양을 목격하고 “재밌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유인해 동작구 사당동의 한 지하창고로 데리고 갔다. 사건 당일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총 2000만원의 몸값을 요구했고, 이날 나리 양을 살해했다.
나리 양을 살해한 이후에도 전현주는 돈을 받아내기 위해 나리 양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고, 경찰은 발신지를 추적해 급습했다. 발신지는 명동의 커피숍이었고, 당시 그곳엔 여성 12명, 남성 1명 등 총 13명이 있었다.
경찰이 검문을 시작하자 전현주는 만삭의 임산부라는 점을 이용해 경찰의 수사망을 빠져나갔다. 그는 자신의 대학 후배들까지 불러 소란을 피웠고, 경찰은 전현주의 지문만 채취한 후 그녀를 보내주었다.
전현주를 검거할 수 있게 도왔던 결정적인 제보자는 전현주의 부모였다. 정부 고위 공직자였던 전현주의 부친은 자택 근처를 탐문하던 경찰에게 딸이 최근 가출 상태라고 알렸다. 아울러 경찰이 들려준 유괴범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이 딸의 목소리임을 실토했다.
전현주의 부모는 사실 딸의 범행 사실을 전해 들었고, 부친은 딸에게 “네가 속죄하는 길은 자살뿐”이라며 “우리도 곧 뒤따라갈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살충제까지 구매해 딸의 손에 쥐어주었다고 한다.
경찰은 즉각 검거에 나섰고, 관악구 신림동의 한 여관에서 전현주를 체포했다. 전현주의 자백에 따라 찾아간 지하 창고 출입구 쪽 계단에서 나리 양을 발견했다.
만삭의 임산부가 범인이라는 사실은 전현주의 남편은 물론 유가족도 단독 범행임을 의문스러워했다. 전현주가 체포되던 당시 남편은 “현주야, 사실대로 말해! 너 아니잖아, 시키는 대로 했잖아”라고 울부짖는 모습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기소된 전현주는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지만, 2심에서 감형돼 무기징역이 확정, 현재 55세로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나리 양의 아버지는 27년 만에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첫딸에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이름을 주고 싶어 ‘초롱초롱빛나리’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던 아버지는 죽은 나리 양을 보고도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화장터에 가서야 참았던 눈물을 끝없이 쏟아냈다. 나리 양의 아버지는 영상에서 “어떻게 뱃속에 아이가 있는 여자가 남의 아이를 죽일 수가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