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재계 “이사 충실의무 대상 확대, 사법리스크 부를 것”

재계, 문제점 지적 ‘반대 목소리’

정부 ‘주주 비례적 이익 위하여’ 내용 담은
‘이사 의무’ 관련 상법 개정 하반기에 계획

한경협 “주주에 손실 입히면 손배 소송을
회사 손해 발생하면 배임죄로 처벌 상황
어떤 판단하든 소송으로 경영 위축 우려”
자본 다수결 원칙 훼손… 현행법과도 충돌
“이상적 관념, 터무니없는 강요” 주장도

정부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현행 회사에서 주주까지로 확대를 추진하면서 재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것이라지만, 주주들의 다양한 이해관계 탓에 이사가 ‘사법리스크’에 노출될 위험이 커지고 이로 인한 경영활동의 위축을 야기할 수 있어서다.

10일 재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이달 중 의견 수렴을 거쳐 하반기에 상법 제382조의3(이사의 충실의무)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기업, 은행 등 빌딩이 밀집한 도심 풍경 위에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연합뉴스

현행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주주의 비례적 이익과 회사를 위하여’로 변경하는 내용이다.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찬성 측에서는 회사와 주주의 이익이 괴리되는 측면이 없는지 확인하는 견제장치가 필요하며, 주주 보호 법제화를 통해 자본시장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 측인 재계는 경영 불확실성이 가중된다며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경제인협회도 이날 권재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 의뢰해 작성한 ‘상법개정(이사 충실의무 확대) 연구용역’ 결과에서 개정 반대 의견을 냈다.

재계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사법리스크’다. 주주의 지분 보유 목적은 단기·장기 투자, 배당 수익 등 다 다르기 때문에 기업의 배당이나 투자, 인수합병(M&A) 등 경영활동에 있어 모든 주주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없다. 회사의 이익과 주주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이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호하다.

예를 들어 일부 주주는 배당 등 당장의 이익 분배를 요구하고, 지배주주는 장기 관점에서 이익을 장기간 유보하길 원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신주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은 회사에 이익이 되지만 기존 주주 지분을 희석해 주주들에게는 손해다. 반대로 배당, 자사주 매입 같은 주주환원 정책은 주주에게 이익이지만 회사에는 손실이다.

 

이사진이 회사에 끼칠 손실을 피하기 위해 주주에 손실을 입히면 주주들은 충실의무 위반이라며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주주 손실을 막으려다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면 이사는 배임죄로 처벌받을 상황에 부닥친다.

재계 관계자는 “어떤 경영상 판단이든 일부 주주에게는 충실의무 위반이 될 소지가 생기고, 이는 소액주주들의 손해배상 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며 “사법리스크로 인해 과감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어려워지며, 기업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행법체계 내 충돌소지가 다분하다는 분석도 있다. 상법상 이사는 주주총회 결의로 회사가 임용한 회사의 ‘대리인’으로 규정돼 있다. 특히 대법원 판례는 회사의 이익과 주주의 이익은 엄격히 구별되며, 회사의 이사는 ‘회사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이지 ‘주주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추가되면 이사가 주주의 대리인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현행 법·판례와 맞지 않게 된다.

 

한 주주총회장에 입장하는 주주들의 모습. 연합뉴스

자본 다수결 원칙에도 훼손된다는 지적이다. 다수 주주가 공동출자해 설립한 주식회사는 ‘자본 다수결 원칙’에 따라 출자 비중이 높은 주주가 경영권을 갖는다. 이사가 소수 주주의 이익도 대변해야 한다면 소수 주주가 누리는 이익은 보유 지분보다 과대평가되는 것이고 대주주 지배권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 주요국도 이사가 회사의 이익에 책임을 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권재열 교수는 “주주의 비례적 이익 보장은 현실화시킬 수 없는 이상적 관념에 불과하다”며 “회사 재산에 대해 법률상 이해관계가 없는 주주에게까지 충실의무를 부담하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강요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진경 기자 l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