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업체가 하는 성교육 프로그램은 접수 1분 만에 마감이에요. 세 번 시도해서 겨우 성공했어요.”
중학교 1학년 자녀를 둔 김모(45)씨는 자녀의 또래 친구들을 모아 ‘성교육 그룹과외’를 추진 중이다. 언론에서 연일 보도되는 교제폭력 사건을 본 그는 “성교육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며 “중학생 정도면 연애에 관심이 생길 나이인데, 자칫 잘못된 성 지식을 배우기 전에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 강남역 교제살인 사건을 계기로 교제폭력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과 함께 건강한 관계를 위한 성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그동안 성교육은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조차 낯뜨거운 것이란 인식 아래 터부시 여기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는 의사소통과 갈등을 관리하는 전인적(全人的) 성교육이 이뤄져야 교제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공신력 있는 성교육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온다.
◆“도움 안 되는” 학교 성교육
10일 교육계에 따르면 학부모들 사이에서 사교육을 통한 성교육은 이미 흔한 일이 됐다. 2019년 ‘N번방 사태’를 계기로 온라인상에 유통되는 성 콘텐츠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일부 맘카페 등을 중심으로 성교육 그룹과외가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성교육이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다, 자녀를 둔 부모세대 역시 성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기에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이다.
학교 성교육에 대한 불만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서울시가 2020년 초·중·고교생 학부모 308명에게 학교 성교육에 대한 인식을 물어보자 응답자의 66.7%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불만족스럽기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정책연구원이 2019년 중학생 506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학교 성교육을 통해 ‘성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는 응답(48.9%)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10명 중 3명은 학교 성교육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초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김모(44)씨는 “강남역 교제살인 사건으로 옆 학교에선 교제폭력 방지 교육을 한다고 들었는데, 우리 학교에선 별다른 계획이 없다더라”며 “반 아이들을 모아 성교육 강사를 초빙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중학교 3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키우는 박모(44)씨는 자녀에게 세 차례에 걸쳐 사설 성교육을 받게 했다. 박씨는 “요즘 시대에 필요한 디지털 성폭력과 미디어 리터러시(미디어 문해력)에 관한 내용을 다뤄서 좋았다”며 “한편으론 학교에서 성교육을 충분하게 해준다면 더 좋겠다는 아쉬움이 든다”고 했다.
남다른성교육연구소의 김연웅 활동가는 “교제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이 교제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한다”며 “어른들도 교제폭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들이 이를 스스로 알기란 더 어렵다”고 강조했다.
◆교육 대상도, 주체도 ‘혼란’
학부모들의 발 빠른 움직임에도 교육현장의 성교육 수준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성교육 표준안을 내놨던 교육부는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와 시·도 교육청의 자율에 맡기겠다며 소극적 입장을 취하고 있고, 학교 현장에서의 성교육은 마땅한 표준안 없이 교사의 역량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전국에서 통용되는 성교육 가이드라인은 2015년 교육부가 발표한 ‘성교육 표준안’이 마지막이다. 교육부는 2018년 표준안을 개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내놓지 못했고, 2019년에는 성교육 표준안에 ‘여성의 복장은 치마’, ‘남성의 성욕은 억제하기 어렵다’는 식의 성차별적 내용이 담겼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일부 내용을 삭제했다.
논란 속에 교육부는 성교육 표준안에서 사실상 손을 뗐다. 교육부 관계자는 “2022년 교육과정부터 성교육이 국교위 관할로 이관됐고, 성교육 과정은 시·도 교육청이 정해서 학교장 재량으로 편성하게 돼 있다”며 “교육부가 지침이나 매뉴얼을 만들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올해까지도 지방자치단체의 성교육·교육자 양성과정 등에 ‘성교육 표준안에 근거한 교육’이라고 명시돼 있는 등 혼란은 이어지고 있다.
이렇다 보니 실제 성교육은 교육자의 역량에 크게 좌우되는 실정이다. 고등학생 채모(18)양은 학교 성교육에 대해 “최근 문제가 된 단체대화방 성희롱에 대해 짚어줘 시의성 있는 교육이 이뤄졌다”며 만족했다. 반면 고등학생 임모(17)양은 “강사가 성인물에 관한 설명을 하다가 대뜸 ‘성소수자끼리 하는 건 보지 말라’는 혐오 표현을 썼다”고 지적했다.
교사들도 어려움을 느끼긴 마찬가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3월 전국 교사 48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성평등 관련 교육과정의 목적과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수업을 준비하기 곤란하다’는 문항에 92.8%의 교사들이 동의했다.
지자체마다 관련 정책이나 예산도 제각각이다. 울산교육청은 2021년 성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집중학년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당시 정책을 시행한 노옥희 교육감이 별세한 이듬해 예산 4억350만원이 전액 삭감되며 사업이 중단됐다. 당시 시의회에서는 ‘청소년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르쳐선 안 된다’는 시대착오적 비판이 잇따랐다.
교육과정이 국교위로 이관된 이후에도 잡음이 이어졌다. 2022년 교육과정 심의 당시 ‘성소수자’와 ‘성평등’ 용어 삭제를 둘러싸고 진보·보수 진영이 부딪쳤고, 결국 이를 뺀 교육과정이 통과되자 진보 성향 위원들이 반발했다.
김 활동가는 “10년 가까이 가이드라인을 개정하지 않았다는 건 성교육을 일선 선생님의 역량에 떠넘겨 버린 것”이라며 “교육청과 지자체부터 성교육이 필수교육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정부와 국회는 포괄적·전인적인 성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과 예산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교육학)는 “성교육은 민감한 주제인 만큼 국교위에서 직접 표결로 결정하게 되면 진영 싸움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며 “국교위는 심의기준을 정하고 결정은 전문가 등 외부 인사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등의 심의과정 개선이 필요하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