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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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독일 화해의 현장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3년 2월 프랑스인 로베르 에브라가 9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소식에 프랑스는 물론 독일에서도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에브라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4년 6월10일 프랑스 남부 리무쟁 지역의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에서 벌어진 나치 독일 친위대(SS)의 집단학살 당시 가까스로 살아남은 6명 중 최후의 생존자였다. 어머니와 2명의 누이를 잃은 채 홀로 마을을 탈출한 에브라는 그 길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고자 레지스탕스에 합류했다.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남다를 법한데도 전후 에브라는 프랑스·독일 화해를 위한 민간 차원의 운동에 앞장섰다. 프랑스 정부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2001)을, 독일 정부로부터는 연방공화국 공로훈장(2012)을 각각 받았다.

 

프랑스 남부 리무쟁 지역의 작은 마을 오라두르쉬르글란. 1944년 6월10일 나치 독일군이 이곳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로 주민 640여 명이 목숨을 잃고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했다. 프랑스 방송 화면 캡처

학살의 발단은 1944년 6월6일 미국, 영국 등 연합국이 단행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나치 독일의 압제 하에 있던 프랑스 국내 항독 운동가들은 연합군의 진군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 인근에 있던 독일군 SS사단을 기습했다. 격분한 독일군 지휘관은 레지스탕스 조직원 색출 및 처단을 내걸고 그해 6월10일 마을을 공격했다. 당시 상황을 에브라는 이렇게 회상했다. “독일 군인들이 여성과 아이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문을 잠갔다. 남자들은 따로 끌고 가서 어느 헛간 속에 밀어넣었다. 헛간에 갇힌 우리를 향해 독일군은 기관총을 난사했다. 얼마 뒤 군인들이 들어와 혹시 산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선 불을 질렀다. 비록 여기저기 다쳤지만 시신 더미에 깔려 눈에 띄지 않은 덕분에 가까스로 헛간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교회에 감금된 여성과 아이들이 처한 운명은 한층 더 가혹했다. 불길에 휩싸인 교회 안에서 그들은 산 채로 화마의 희생자가 되었다.

 

단 하루 만에 640명 넘는 민간인이 숨지고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전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프랑스 정부 결단에 따라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은 오늘날에도 참사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그러면서 2차대전의 비극을 후세에 전하는 체험 교육의 장으로 정착했다. 이곳을 찾는 연간 약 30만명의 방문객 대다수는 독일 학생들이라고 한다. 2013년에는 당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이 나란히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을 방문했다. 에브라가 직접 해설가로 나서 두 대통령에게 그때 상황을 설명했다. 가우크 대통령이 눈물을 글썽이며 에브라, 그리고 올랑드 대통령과 차례로 포옹하는 장면은 프랑스·독일 화해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10일(현지시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의한 프랑스 민간인 집단학살의 현장인 프랑스 남부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에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왼쪽)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서로 팔을 부여잡은 채 양국의 화해를 다짐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학살 80주기를 맞아 10일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을 찾았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학살을 자행한 살인자들이 독일에서 처벌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꼬집으며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다. “민족주의와 증오가 유럽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연설 내내 독일어 대신 프랑스어를 썼다. 마크롱 대통령은 그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며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은 더는 수치심의 현장이 아니라 희망과 화해의 장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유럽 국가들의 형제애를 강조했다. 그 우정이 영원하길 바랄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