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유럽 등 서방에서 ‘비합법’(illegal) 정보 요원을 통한 스파이 행위를 공격적으로 벌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평범한 일반인으로 위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7일(현지시간) 러시아의 비합법 정보 요원 의심 사례가 최근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비합법 스파이들은 외교관 등 공무원으로 가장하는 대다수 스파이와는 달리 러시아와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 신분을 위장한다. 그들은 표적 지역에 깊숙이 파고들어 정보원 망을 만들고 포섭 후보를 확인하는 데 수년을 보낸다. 또 주재국의 면밀한 감시를 받는 경향이 있는 외교관 위장 스파이들을 위한 임무를 수행한다.
이 같은 작전은 옛 소련 초기에 시작돼 1940년대 미국 핵무기 기밀을 빼내려는 소련의 활동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는 이러한 비합법 정보 요원들을 적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잠재적 위협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여겼다. 그는 특별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들을 전략적 중요성이 있는 서방 국가에 배치했다.
WSJ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 프로그램을 다시 활성화했으며, 이는 러시아가 서방을 상대로 벌이는 ‘그림자 전쟁’에서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2022년 12월 슬로베니아에서 체포된 두 명의 러시아 비합법 정보 요원의 사례는 러시아의 이 같은 활동을 잘 보여준다. 젊은 아르헨티나 이민자 부부로 위장한 이들은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 교외 중산층 지역에 있는 집에서 두 자녀와 함께 살면서 이웃들 눈에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해 보이는 삶을 연출했다.
그러나 이들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일원이자 유럽연합(EU) 회원국인 슬로베니아를 근거지로 삼아 인근 이탈리아,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유럽 전역을 다니며 정보원들에게 돈을 지급하고 본국의 지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들은 언젠가 자신들이 체포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어린 자녀들도 훈련했다고 슬로베니아 당국자들은 말했다.
슬로베니아에서 활동하던 이들 정보 요원이 체포된 직후에는 그리스, 브라질 여권을 소지한 한 여성과 남성이 갑자기 아테네와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사업체와 연인까지 버리고 떠났다. 이 두 사람은 러시아 정보관 부부로, 각자 그리스와 브라질에서 가짜 배경을 만드는 중이었다고 당국자들은 전했다.
슬로베니아에서 자국 스파이들이 체포되자 첩보망 붕괴를 우려한 러시아 첩보 당국이 둘을 본국으로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네덜란드에서 노르웨이, 체코, 불가리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러시아의 비합법 정보 요원으로 의심되는 사례들이 포착됐다.
이는 2010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미국에서 러시아 스파이 10명을 체포한 ‘유령 이야기 작전’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위장 요원들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라고 WSJ은 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전 세계에서 러시아 정보관으로 의심되는 외교관 700명가량이 추방되면서 이 같은 위장 간첩은 러시아에 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고 WSJ은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