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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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2차대전史 다시 써야 하는 이유

주한 러 대사관 “蘇 덕분에 광복”
히틀러 뺨치는 스탈린 전범 행각
유럽에선 “제대로 알리자” 목소리
러의 현대사 왜곡 시도 경계해야

“독일이 패전한 지 3개월 후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대일전을 포고했다. (1945년) 8월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밤, 한반도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 한반도 해방전에는 소련군을 제외하고는 미군을 비롯해 그 어떤 나라의 군대도 참전한 바가 없다.”

‘한반도 해방전’이란 표현이 생경하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방북을 1개월여 앞둔 5월7일 홈페이지에 한국어로 게재한 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 소련의 기여’의 일부다. 대사관은 “전투력이 높았던 일본군을 소련군이 11일 만에 격파했다”며 “8월15일쯤 사실상 38선까지의 영토를 모두 해방시켰다”고 했다. 한국의 광복은 전적으로 소련 덕분이란 뉘앙스가 짙다.

김태훈 논설위원

소련군 참전과 미군의 원폭 투하 중 뭐가 일본 항복에 더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는 학계의 논쟁거리다. 러시아 학자들은 전자, 미국 학자들은 후자를 꼽는다. 영국의 전쟁사 권위자 필립 벨은 저서 ‘12 전환점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 참전에 대해 “그 공격이 일본 본토를 목표로 한 것도 아니었다”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면서 “원자탄이 최종적으로 일본을 항복으로 몰아넣고 2차대전을 종결시킨 원인”이라고 밝혔다. 이게 정답일 것이다.

2차대전 기간 벌어진 일들 가운데 러시아는 감추고 세계 여러 나라는 간과하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1939년 9월1일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며 2차대전이 시작됐다고 배운다. 그런데 폴란드군이 서쪽에서 한창 독일군과 싸우던 9월17일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의 소련이 폴란드를 동쪽에서 기습한 사실은 그리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폴란드는 독·소 양국에 의해 동서로 분할됐다. 당시 불가침조약을 맺은 두 나라는 마치 동맹 같았다.

소련이 영국 등 연합국의 일원이 된 것은 독일이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부터다. 그때까지 약 2년간 소련은 무슨 짓을 저질렀나. 핀란드를 공격해 국토 약 10%를 강탈했다.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3국의 주권을 빼앗고 강제로 자국에 편입시켰다. 그들은 소련이 해체된 1991년에야 독립국 지위를 되찾는다. 루마니아에도 노른자위 땅을 내놓으라고 다그쳐 관철했다. 이쯤 되면 히틀러와 스탈린 중 누가 더 악독한 전범인가.

1945년 소련이 미국·영국과 더불어 3대 전승국으로 부상하며 소련의 ‘흑역사’는 파묻혔다. 한때 폴란드 침공을 명령한 스탈린이 되레 폴란드의 해방자로 칭송받는 지경까지 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직후인 2022년 7월 폴란드·루마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5개국 정상은 유럽연합(EU) 다른 회원국 지도자들 앞으로 공동 서한을 발송했다. 그들은 “나치는 패전과 전범 재판을 통해 처단됐고, 독일은 지난 과오를 반성했다”며 “그런데 소련의 범죄는 왜 응징도, 제대로 된 평가도 이뤄지지 않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 “소련의 범죄에 대한 기억과 지식은 유럽인들 의식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며 “소련의 잘못을 학생들한테 가르치는 것이 EU 모든 회원국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가 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극히 타당한 주장이라 하겠다.

어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난 푸틴이 북·러 간 동맹에 준하는 밀착을 과시했다. 그는 북한 노동신문 기고문에서 “1945년 8월 소련 군인들은 조선의 애국자들과 함께 어깨 겯고 싸우면서 (일본) 관동군을 격멸시키고 식민주의자들로부터 조선반도를 해방하였으며 조선 인민 앞에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발전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자화자찬했다. 소련의 기여를 부인할 순 없으나 침소봉대가 심하다. 특히 ‘자주적·독립적 발전’ 운운한 대목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2차대전 때 쓰고 남은 무기를 북한에 주면서 6·25 남침을 사주해 남북한 모두를 폐허로 만든 게 누구인가. ‘한반도 해방자’를 자처하는 러시아의 노림수는 한·미 동맹을 뒤흔들고 남남갈등을 부추기려는 심리전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러시아에 맞서려면 유럽은 물론 한반도의 2차대전사도 다시 쓰여야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