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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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은 외국 아니다”라고 한 서독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짧았지만 파장이 엄청나다. 양국 중 어느 한 나라가 무력 침공을 받으면 지체 없이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이 대표적이다. 남북 간에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는 경우 러시아가 개입할 길을 연 것이란 우려가 크다. 19일 정상회담 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가장 진실한 벗이자 전우인 러시아 동지들과 뜻깊은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번에 거둔 외교적 성과에 크게 만족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19일 평양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북·러 양국의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뒤 조약 문서를 든 채 악수하고 있다. 노동신문·뉴스1

푸틴의 방북을 계기로 북·러가 체결한 양자조약의 공식 명칭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이다. 순전히 북한과 러시아 양자관계에 관한 내용이고 ‘남조선’(한국)이나 ‘통일’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과거 북한이 러시아와 맺은 비슷한 조약에 ‘러시아는 조선반도(한반도) 통일을 위한 노력을 환영하고 지지한다’라는 취지의 조문이 들어간 점과 대조적이다. 이는 김정은이 “북남 관계는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라며 통일을 사실상 포기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그간 남북 간에는 ‘국가 대 국가 관계가 아니고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그런데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도 믿었던 이 논리를 배척한다. 한마디로 남한과 북한은 서로 별개 나라이며 따라서 통일은 어불성설이란 얘기다. 이를 두고 ‘옛 동독을 보는 듯하다’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동서 냉전이 극심하던 1970년대 서독과의 체제 경쟁에서 뒤진 동독이 꼭 오늘날의 북한처럼 ‘동서독은 서로 별개 나라다’, ‘통일을 지향하지 않는다’ 등 주장을 펼쳤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인 1974년 6월20일 동서독이 서로의 수도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했다. 동독 대사는 서독 대통령, 서독 대사는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에게 각각 신임장도 제정했다. 애초 동독이 원한 것은 대표부가 아닌 정식 대사관 설치, 그리고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그런데 서독이 “동독은 외국이 아니므로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다”며 대사관보다 격이 낮은 대표부를 고집해 관철시켰다. 북한이 뭐라고 하든 우리가 현행 대북정책을 고수해야 할 필요성을 과거 서독의 사례가 보여주는 듯하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