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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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원리 무시한 전기료 동결, 조만간 ‘폭탄’ 돼 돌아올 것 [논설실의 관점]

한국전력공사(한전) 설립 이후 첫 정치인 출신인 김동철 사장은 지난해 9월 취임 첫 일성으로 ‘전기료 인상’을 역설했다. 김 사장은 지난달에도 기자들과 만나 “한전의 노력만으로 대규모 누적 적자를 더는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고 털어놨다. 최소한의 전기요금 정상화의 필요성을 정부 당국에 간곡히 호소한다고도 했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안덕근 장관 또한 같은 달 “전기·가스 요금 정상화는 반드시 해야 하고 시급하다”고 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2024년 3분기 전기요금이 동결된 21일 서울의 한 주택가에 설치된 전력 계량기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뉴스1

3분기 전기요금이 또다시 동결됐다. 한전은 어제 3분기에 적용할 연료비조정단가를 현재와 같은 kWh(킬로와트시)당 5원으로 유지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2분기 인상 이후 5분기 연속 동결이다. 연료비조정단가는 전기요금을 구성하는 기본요금, 전력량 요금, 기후환경 요금, 연료비조정 요금 중 최근의 단기 에너지 가격 흐름을 반영하기 위한 연료비조정 요금의 계산 기준이 되는 것으로 매 분기에 앞서 결정된다. 한전과 산업통상자원부가 기본요금, 전력량 요금, 기후환경 요금 등 나머지 요금도 따로 올리지 않기로 해 3분기 요금은 최종 동결됐다. 고물가 우려가 전기요금 인상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재정 당국의 고민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전의 부채와 적자는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장기간 역마진 구조로 발생한 적자를 막기 위한 사채발행 배수가 5배(자본금+적립금의 5배·누적부채 203조원)에 달해 부도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다. 자구책만으론 43조원까지 불어난 누적적자 해소가 불가능하다. 물가를 핑계로 내세웠지만, 또다시 정치논리가 시장에 개입한 꼴이다.

서울의 한 건물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들. 연합뉴스

이른 폭염으로 올여름 전력수급에 비상이 걸린 실정이다. 물가 부담을 고려해 전기 사용량이 많은 여름철에 한해 요금을 동결하겠다는 논리 자체가 궁색하다. 여름나기가 힘든 서민들의 고충을 덜어줄 수는 있겠지만, 자칫 전기요금 동결이 에너지 과소비를 부추길까 걱정이다. 언제까지 고물가를 전기요금 인상을 늦추는 변명거리로 삼을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재원 부족에 허덕이는 한전이 송·배전망 같은 전력 인프라 투자까지 줄이면서 전력 산업의 생태계마저 위협받고 있다.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전기요금 구조를 더는 방치할 수는 없다. 시장원리를 무시한 정치적 셈법에 따른 전기요금 동결은 조만간 전기료 폭탄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에너지 과소비를 막고 한꺼번에 터질 충격을 완충하는 차원에서라도 전기료는 순차적으로 올리는 게 순리다. 한전이 매년 4조∼5조원씩 내는 이자 역시 따져보면 다 국민의 부담이다. 요금 인상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한전의 자구노력도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