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6월22일 콩피에뉴 숲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주말에 자녀를 데리고 부쿠레슈티 시내 공원을 산책하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 낯선 동양인인 내게 프랑스어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곤 했다.” 2000년대 초반 루마니아에 근무한 어느 중견 외교관의 회상이다. 지금이야 영어가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루마니아 학교들은 프랑스어를 제1외국어로 가르쳤다. 루마니아가 프랑스와 같은 라틴족 혈통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과거 프랑스와 프랑스어의 위상이 그만큼 높았음을 보여준다.

2018년 11월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왼쪽)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함께 파리 북쪽 콩피에뉴 숲을 찾아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양국 장병들을 추모하고 있다. SNS 캡처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에 맞서 프랑스·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전쟁 초반만 해도 프랑스가 독일에 질 거라고 여긴 이는 많지 않았다. 병력 수나 장비 면에서 프랑스는 유럽, 아니 세계 제일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는 영국이 함께하는 만큼 독일의 승리는 난망하다고 봤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독일 육군이 프랑스보다 훨씬 강했다. 1940년 5월 시작한 프랑스와 독일의 지상전은 단 6주일 만에 독일의 압승으로 끝났다.

 

한때 영국과 더불어 세계를 호령한 프랑스는 어쩌다 개전 후 2개월도 채 안 돼 무너졌을까. 국론분열과 군사적 무기력 탓이었다. 우파는 “히틀러가 공산주의 소련의 위협에서 서유럽을 지켜줄 것”이라며 나치 독일과의 화친에 매달렸다. 좌파도 “전쟁이 나면 노동자 삶이 더욱 피폐해질 것”이라며 무작정 평화만 외쳐댔다. 여기에 프랑스군 지도자들은 ‘우리는 결코 독일군을 이길 수 없을 것’이란 패배주의에 휩싸여 있었다. 장성들부터 이 모양이니 병사들의 사기야 오죽했겠나.

1940년 6월22일 파리 북쪽 콩피에뉴 숲에 세워진 열차 객실에서 프랑스 및 독일군 대표들이 양국 간 휴전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이 조약으로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국토의 3분의 2를 독일군이 점령하고 그 비용은 모두 프랑스가 부담하게 됐다. SNS 캡처

지금으로부터 꼭 84년 전인 1940년 6월22일 프랑스군은 파리 북쪽 콩피에뉴 숲에서 독일군에 항복했다.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국토 3분의 2를 독일군이 점령하고 그 비용은 모두 프랑스가 부담하는 굴욕적인 휴전조약이 체결됐다. 베를린에서 달려 온 히틀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 모습을 지켜봤다. 물론 전후 프랑스와 독일은 화해했고 콩피에뉴 숲은 양국의 우정을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 하지만 2차대전 초반의 참패가 오늘날 프랑스와 프랑스어의 위상 축소로 이어진 점을 잘 아는 프랑스인들로선 해마다 맞는 6월22일의 기억이 달갑지 않을 듯하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