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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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의 ‘셔츠 정치’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정치나 외교 영역에서 옷과 각종 장신구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는 창구로 활용되곤 한다. ‘브로치 외교’라는 말까지 만들어 낸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7∼2001년 미국 외교를 책임진 그를 향해 이라크 언론이 “사악한 뱀 같다”고 비난한 적이 있다. 당시 이라크는 대표적 반미주의자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고 있었다. 분노한 올브라이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장에 진짜 뱀 모양을 한 브로치를 착용한 채 참석했다. 2022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한 올브라이트가 생전에 이용한 브로치 200여개는 오늘날 미 국립외교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었다.

 

23일 우원식 국회의장(가운데)이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왼쪽),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 등과 만나 원 구성 협상을 중재하기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우 의장이 국민의힘을 상징하는 빨간색과 민주당을 상징하는 파란색이 뒤섞인 알록달록한 무늬의 셔츠를 입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뉴시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정치·외교 분야 메시지 전달에 특이하게도 양말을 활용한다. 코로나19 대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11월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만난 트뤼도는 파란 양복 색깔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빨간 양말을 신어 눈길을 끌었다. 자세히 보면 빨간색 바탕에 파란색, 그리고 흰색 문양이 들어가 미국 국기 성조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 두고 ‘트뤼도가 바이든 행정부 들어 부쩍 가까워진 캐나다·미국 관계에 만족을 표시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는 두 나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독특한 양말 덕분에 트뤼도는 새로운 세대 리더의 이미지를 굳혔다”며 “양말은 그에게 사람들과 소통하는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나경원 의원이 녹색 바지 정장 차림을 선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여성 정치인들 사이에 녹색 바지 정장은 이른바 ‘전투복’으로 통한다. 이는 군인들, 특히 육군 장병들이 입는 제복이 녹색 계통이란 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국에서 흔히 ‘국방색’이라고 불리는 올리브색 역시 녹색과 가깝다. 다만 올리브색은 우리가 흔히 보는 녹색보다 훨씬 더 짙다. 여소야대로 위기에 처한 여당을 이끌 대표가 되겠다며 출사표를 던진 나 의원이 입은 녹색 의상은 굳이 따지자면 녹색당으로 대표되는 환경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그 색깔에 더 가까운 듯하다. 마침 나 의원은 윤석열정부 초기 기후환경대사를 지내는 등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지대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23일 여야 원내대표를 불러 원(院) 구성 협상을 중재할 당시 패션에 눈길이 쏠린다. 비록 일요일이었지만 여야 원내대표가 넥타이까지 맨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참석한 것과 달리 우 의장은 노타이에 알록달록한 셔츠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의 셔츠를 곰곰히 들여다보니 파란색과 빨간색이 뒤섞여 있다. 파란색은 원내 과반 다수당이자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상징한다. 빨간색은 비록 원내 2당이지만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의 당색(黨色)에 해당한다. 여야 간 합의 그리고 협치를 원하는 우 의장의 속내가 옷차림에까지 반영된 것 아닌가 싶다. 이튿날인 24일 여야 간 원 구성 협상이 타결되었으니 우 의장의 ‘셔츠 정치’가 일단 성공을 거둔 셈이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