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우리나라와 수교한 지 올해 73주년을 맞은 유럽의 전통우호국이다. 과거에는 투우와 축구의 나라로만 알려졌으나 최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주요한 유럽 관광지다. 관광뿐 아니라 양국의 경제· 문화 교류도 활발해지는 등 주요한 관심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은진의 ‘에스파냐 이야기’ 연재를 통해 켈트, 로마, 이슬람 등이 융합된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소개한다.
엘 그레코는 특이하게도 스페인에서 활동한 그리스 태생의 화가였다. 1577년 당시 스페인의 수도였던 톨레도로 이주하여 펠리페 2세의 후원을 받아 궁정화가로 활동하였다. 스페인 르네상스 화풍을 이끈 화가로 알려져 있다.
엘 그레코는 당시의 궁정화가들처럼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에서는 전직 창녀였던 막달레나가 광야에서 죽음과 불멸에 대해 묵상하며 개종하는 순간을 묘사한다. 상반신을 반쯤 드러내 에로틱함을 나타내지만, 배경으로 비치는 눈부신 광선이 그녀를 순결하게 정화하고 있다. 이 세상의 절멸을 상징하는 ‘해골’을 손에 잡고 있지만, 그녀의 뒤에는 영생을 상징하는 ‘담쟁이덩굴’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생(生)과 사(死)가 한 공간에 있다. 달빛이 비치는 차갑고 창백한 색조로 그려진 새벽 풍경은 영적인 카타르시스의 경험을 섬세하게 나타낸다.
또 다른 유명한 종교화 작품으로 <수태고지(受胎告知)>가 있다. 엘 그레코는 여러 편의 수태고지를 그렸다. 하지만, 부다페스트에 소장된 이 작품의 색감이 독특하다. 이 작품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모 마리아 앞에 나타나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낳을 것이라고 알리는 신약성서의 중요한 순간을 묘사한다. 후기 르네상스 화풍인 엘 그레코의 독특한 스타일은 길쭉한 인물 묘사와 함께 생생한 색상 팔레트 조합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신성한 계시를 받는 이 장면에서 마리아는 가브리엘로부터 이 특별한 메시지를 받을 때 은혜와 겸손으로 서 있다. 성령이 그녀 위에 떠다니고, 빛의 광선은 그녀의 주변을 밝게 비추고 있다.
엘 그레코는 시대를 앞서간 화가였다.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 소장된 <무염시태(La Inmaculada Concepción)>를 보면 20세기 이후의 그림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어둡고 기괴한 색감이 특징이다. 엘 그레코는 작품의 형태보다 색(色)을 더 우선시한 화가였다. 차가운 색감과 색감의 대조를 통해 나타나는 뚜렷한 형태가 스페인에서 그가 그렸던 화풍의 특징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그리스 태생의 천재 화가는 스페인의 또 다른 천재 화가를 낳았다. 엘 그레코의 이러한 색감은 피카소의 ‘청색 시대’ 화풍에 영향을 미쳤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릴 때 엘 그레코의 색조와 입체감에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은진 스페인전문가·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