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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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폭탄 악몽’ 잊었나 ‘막고 덮인’ 빗물받이…“이러니 빗물 넘치지” [김기자의 현장+]

고무판 위에 고인 빗물…빗물받이 ‘기능 상실’
폭우 땐 저지대 침수 우려
각종 오물이 빗물 타고 아래로 ‘둥둥’

“사고 나면 남 탓. 스스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하는데, 요즘은 당한 사람만 바보 되는 겁니다.”

 

 

서울 용산구의 한 골목길. 고무판으로 덮여 있는 빗물받이 주변에 ‘안녕, 빗물받이’ 스티커가 부착돼 있다. “‘안녕, 빗물받이’에는 ‘우리 이웃’을 지키는 ‘빗물받이’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지난 2일 오전 11시40분쯤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인근에서 빗물받이 주변을 정리하던 한 주민이 이렇게 말했다. 이날 중서부 지역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서울 등 수도권에는 시간당 30mm 안팎의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점심시간인 만큼 거리에는 우산을 쓴 직장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산에 의지한 한 시민은 우산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에 윗옷을 적시고 있었고, 다른 시민은 몸을 움츠린 채 비를 조금이나마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식당 입구나 인근 건물에 있는 시민들은 젖은 옷을 손으로 털고 있기도 했다.

움푹 파인 빗물받이 위에 빗물이 고여 있다.

 

상가 입구 곳곳에는 각종 고무 발판 등으로 덮여있는 빗물받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수시설에서 올라오는 악취를 막기 위해 빗물받이를 막아 놓기도 한다. 덮여 있던 빗물받이에는 어김없이 썩은 담배꽁초가 눈에 띄었다. 각종 생활 오물이 검은 때가 잔뜩 낀 채 입구를 막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 골목길 담벼락에는 ‘감시카메라 단속촬영 중’이라는 경고문도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반 쓰레기는 물론 의자, 전구, 각종 음식물이 담긴 봉투도 버려져 있었다. 특히 찢어진 음식물 봉투에서 오물이 빗물을 타고 흘러 덮여 있던 빗물받이 고무판 위로 고이기도 했다.

 

우산을 쓴 채 골목길을 정리 중이던 주민 김모씨는 “구청에서 청소에 신경을 쓴 것 같은데, 보여주기식 행정이 아닌가 한다. 꼭 물난리 났을 때만 청소하는 것 같다”고 인상을 찌푸렸다.

 

빗물받이가 덮여있는 탓에 빗물은 경사면을 타고 흐르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대형 우산을 써도 무릎 아래가 젖을 정도였다. 골목길에는 제때 치워지지 않았단 탓에 젖은 종이상자에서 나온 잔 쓰레기들이 빗물을 타고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빗물받이가 곳곳에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빗물이 흡수되지 않는 각종 고무 덮개로 덮여있는 탓에 배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그 위로 그대로 흘러 내려갔다. 쏟아진 빗물이 도로는 물론 움푹 파인 빗물받이 위에 가득 고여 있기도 했다. 점검이 제대로 되지 않은 빗물받이에는 각종 오물이 퇴적물처럼 쌓여 넘치는 곳도 있었다.

 

용산구 삼각지 인근 한골목길. 다수 빗물받이가 각종 생활 도구로 덮여 있다.

 

빗물받이가 막히고 덮여있는 탓에 빗물은 경사면을 타고 흐르면서 유속은 빨라졌고, 건물 배수관에서 흐른 빗물까지 더해지자, 골목길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사람들은 신발이 젖을까 흐르는 빗물을 위태롭게 피해 다녔지만, 유속 탓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신발 앞코를 타고 튀는 빗물에 무릎까지 흠뻑 젖을 정도였다.

 

폭우 탓에 큰 대로변도 마찬가지. 차가 지나칠 때마다 혹여 자신에게 물이 튈 것을 우려해 피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용산구 삼각지역 인근 대로변. 빗물받이가 꽉 막힌 탓에 고여 있던 빗물이 자동차가 달릴 때마다 인도로 튀고 있다.

 

삼각지역 인근에서 만난 이모씨는 “이렇게 큰 대로변에서 빗물받이 청소라도 제때 하면 좋은 데 안 해. 여 봐 막혀 있잖아요. 폭우가 쏟아지는 오늘 같은 날 차들이 달릴 때마다 고인 빗물이 인도로 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꽉 막힌 배수시설

 

도로 곳곳에 설치된 소형배수 시설 빗물받이. 많은 비가 내리는 날에는 막혀 있던 빗물받이가 쓰레기로 가득 차 들썩이거나 각종 오물이 섞여 도로로 역류하기도 한다. 집중호우라도 내리는 날에는 쓰레기 때문에 빗물이 흘러들어 가지 못해 침수를 막기는커녕 저지대 주택의 침수 피해를 발생시키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각종 생활 쓰레기로 막혀 있는 빗물받이.

 

2022년 8월8일 밤 기록적인 폭우로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발달장애가 있는 일가족 3명이 반지하에 갇혀 숨졌다. 안전을 위해 창문에 설치된 쇠창살을 이웃주민들은 뜯어낼 수 없었다. 당시 서울에는 하루 동안 381.5㎜(동작구 기준)의 비가 내렸다. 1907년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많은 강우량이었다. 서울의 21만 반지하 가구 가운데 관악구와 동작구에만 약 3만 호가 밀집해 있고, 그만큼 피해도 집중됐다. 관악구 신림동에선 모녀 등 일가족 3명이, 동작구 상도동에선 1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빗물받이는 빗물을 하수관으로 흘려보내는 수방 시설로 쓰레기·흙·담배꽁초·덮개 등으로 막혀 배수가 원활하지 않을 땐 적은 비에도 도로가 침수될 수 있어 구청에서 지속적인 관리를 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곳에서 미관저해와 악취를 이유로 덮개로 덮어놓는 등 빗물받이 설치 목적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용산구 한 도로가. 빗물받이가 막혀 탓에 빗물은 경사면을 타고 흐르고 있다.
빗물받이가 덮여있는 탓에 빗물은 경사면을 타고 흐르고 있다.

서울시 한 관계자는 “일단 빗물받이 덮개가 있으면 침수 원인이 될 수가 있다. 결국 피해는 시민분들한테 다시 돌아간다”며 “평시에도 덮개는 덮어두지 마시고 만약 악취가 난다면 자치구 시설과에 연락을 하면 세정 작업 등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이런 장마철에는 언제 비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각 구청에 고무 덮게 같은 것을 평시에도 제거하라고 공문을 보낸다”며 “구청에서 제거한다고 해도 상가에서 또다시 설치하는 경우도 있어 어려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글·사진=김경호 기자 stillcu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