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방북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설정하는 조약을 맺은 뒤 한국 정치권뿐만 아니라 미국 조야에서 한국의 핵안보 확대와 관련된 논의들이 다시 오가고 있다. 지난해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이 잇따르자 이에 대한 국민적 우려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핵협의그룹(NCG)을 창설하는 워싱턴선언을 한·미 간에 체결하면서 일부 잠잠해졌던 논쟁들이다.
러시아와 북한이 안보와 관련해 상호 개입을 공식화하고 러시아가 무기와 탄약 제공의 대가로 북한에 고급 핵·미사일 기술을 제공한다면 북한의 핵보유 수준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준으로 접어든다. 한반도 안보문제 역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셈이 된다. 이와 함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은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공고화한 제도적 확장억제를 뒤흔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향후 미국 대선 결과와 맞물려 한국의 핵안보 논의가 다시 한 번 요동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다시 떠오르는 핵안보 논의
지난해 NCG를 창설해 양국 간 확장억제를 강화하고 핵 전략을 함께 기획하고 공동 운영하기로 한 워싱턴선언이 한·미 간에 체결된 이후 양국 정부는 미국의 한반도 확장억제 수준이 전례 없이 높은 수준이라고 자평했다.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수준을 높인다는 계획도 1년 넘게 실행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안보 환경 변수와 함께 1년여 만에 핵안보 확대 논의는 다시 돌아왔다. 김현욱 세종연구소 소장은 4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NCG는 기본적으로 시한부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지난해 NCG가 자체 핵무장론 등 한반도를 달궜던 핵안보 논쟁을 잠재웠지만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의 길을 걷고 있고, 그것이 가시화되는 과정에서 남북한 간 핵보유 불균형은 계속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 소장은 국내외에서 NCG와 관련된 논쟁이 계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반도 내에 핵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짚었다. 아무리 한반도 유사시 미국 영토에서 핵을 신속하게 공급한다고 하더라도 역내에 핵이 없는 이상 신속한 공동작전이 가능하느냐의 의문이 남는 것이다. 이는 NCG의 핵심 과업인 한·미 핵 재래식 통합(CNI, Conventional Nuclear Integration)이 한반도 혹은 역내에 핵이 없을 경우에도 실현 가능하느냐는 의문과 일맥상통한다.
북·러 간 핵·미사일 협력 강화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인도태평양 전역의 핵안보에 영향을 미친다는 미국의 인식 역시 한반도 핵안보 강화 논의와 연결된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 같은 프로그램의 앨런 김 차석은 지난달 20일(현지시간) CSIS 홈페이지에 올린 공동기고문에서 김 위원장이 북한의 탄약 공급을 대가로 고급 핵·미사일 기술을 요구한다면 푸틴 대통령은 기술을 제공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미국과 동맹국들은 북한을 대응하는 데 집중하느라 대만의 유사시에 대비하기 어렵게 됨으로써 이 지역의 안보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다고 짚었다.
◆트럼프 재선되면 NCG 후퇴하나
북·러 협력 강화라는 안보 환경의 변화 외에도 핵안보 논의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다. 4개월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이다.
워싱턴선언은 바이든 행정부의 치적이다. 바이든 행정부 인사들이 주로 NCG 체제에 충성도가 높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달 24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CFR) 행사에서 한반도에서 핵 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워싱턴선언 외에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워싱턴선언이) 우리가 지금 대응하는 데 필요한 것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며 “우리는 그저 워싱턴선언의 구체적인 조치를 이행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가지면 된다”고 답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에서 일했거나 트럼프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에게서는 다른 목소리가 나온다. 푸틴 대통령의 방북으로 야기된 한반도 위기 고조에 대한 언급이지만, 선거 국면에서 바이든 행정부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방안의 하나로 한반도 핵안보 관련 내용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표적 한반도 실무자 중 하나인 앨리슨 후커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지난달 21일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 화상토론회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고, 어쩌면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며 “북·러의 관계 심화가 확실히 한국을 이러한 방향으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트럼프 전 대통령 측 인사인 엘브리지 콜비 전 미국 국방부 전략·전력개발 부차관보 역시 27일 미국의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미국도 북한의 위협이 얼마나 심각한지, 워싱턴선언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며 “우리는 비확산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아시아에서 핵 비확산은 중국과 북한에게는 큰 성공을 준 반면 한국, 일본, 미국에게는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한국의 자체 핵무장에 긍정적으로 비치는 발언을 해왔다. 이는 결국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안보 무임승차론’과 연관된다. 빅터 차 석좌는 지난달 26일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집권 시 바이든 행정부의 제도적 확장억제 노력이 무위로 돌아갈 것이라며 그의 주한미군 철수와 북핵 용인 정책 등이 결국 한국의 자체 핵무장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북한에게 잘못된 신호를 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美에서 계속되는 ‘집단방위체제’ 주장
하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이 돌아왔다고 바로 한반도의 자체 핵무장을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미국 조야에서 진영을 막론하고 비확산에 대한 지지가 견고하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트럼프 전 행정부 측 인사들에게서 나오는 핵무장 용인 언급은 선거기간에 국한된 발언이라는 얘기다.
국내 일각에선 자체 핵무장의 대안으로 잠재적 핵능력 보유를 주장하지만 이 역시 미국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2035년까지 유효한 한·미 원자력협정으로 묶여 있고, 핵무기 제조로 이어질 수 있는 기술은 모두 원천 금지돼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에 전술핵을 재배치하거나, 한국이 잠재적 핵능력을 갖거나 자체 핵무장을 하는 것 모두 미 조야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시나리오다.
한국이 핵능력을 자체적으로 갖는 것의 대안으로 워싱턴 조야에서는 한·미 간 NCG를 유지·발전하는 방안 외 집단방위체제에 대한 요구가 나온다. 차 석좌와 김 차석은 기고문에서 “(북·러 관계 심화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적절한 대응은 미국, 일본, 한국, 필리핀이 7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공동의 집단방위체제를 고려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른바 아시아판 나토 창설 주장이다. 이 경우 괌 등에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되고 이를 아시아 동맹국들이 공유하는 ‘나토식 핵공유’가 실현될 수 있다.
다만 김현욱 소장은 이 경우 미국, 일본, 필리핀, 호주 등의 최대 관심사는 대만해협의 위기와 중국의 핵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우선 관심사인 북핵과는 거리가 있다. 중국은 지금도 공공연히 아시아판 나토 창설을 경계하고 있다. 일본과의 핵공유에 반발이 나올 수도 있다. 지난해 일본의 NCG 참여 관련 보도가 나왔을 때 일본이 한국과 핵 전략·기획을 공동으로 하는 데 대한 우려와 반감이 국내 정치권과 외교가에서 제기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