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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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비추는 577개 거울… 인류의 죄 고발하다

평생 걸쳐 식민지배·군부 독재 맞선
언론인이자 작가인 저자 갈레아노
인류사 시초부터 현재의 세계사 다뤄
기존 역사에 맞서는 또하나의 역사책
특유의 유머·신랄한 풍자로 현실 폭로

거울들-거의 모든 사람의 이야기/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조구호 옮김/ 알렙/ 2만9000원

 

“유대인들은 여러 세기 동안 추방과 학살을 당했다. 영국은 1290년 유대인을 모두 추방했다. 다음으로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에서 연이어 쫓아냈다. … 히틀러에 의해 이루어진 학살은 기나긴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유대인 학살은 늘 유럽 사람들의 스포츠였다. 그 스포츠를 결코 행하지 않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엉뚱하게도 지금 대가를 치르고 있다.”(215쪽, ‘악마는 유대인’)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그 바람에 아프리카의 식민지도 잃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토고와 카메룬을 나눠 가졌고, 탄자니아는 영국인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차지했다. …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30년을 ‘세계 평화기’라 불렀다. 이 달콤한 몇 년 동안에 지구 4분의 1이 반 다스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396∼397쪽, ‘유럽 식탁에 공헌한 아프리카’)

지금까지의 세계사는 서구, 백인, 남성, 권력자의 역사였다. 저자는 기존의 세계사를 거꾸로 세운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문학’. ‘이야기의 힘’에 기대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에서 배제된 비화(秘話)와 이설(異說), 사건과 장면들을 담은 577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엮어 거대한 모자이크화로 세계사를 직조한다. 사진은 스페인 마드리드 에스파냐국립도서관에서 열린 전시회 ‘괴물과 상상의 존재’에 나왔던 판화 작품들이다. 이 전시회에서 영감을 받은 저자가 ‘거울들’의 본문에 사용 허락을 구해 삽화로 실었다. 알렙 제공

저자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언론인이자 위대한 작가로, 평생에 걸쳐 식민 지배와 군부 독재, 자본의 착취에 맞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한 책 ‘수탈된 대지’가 그의 대표작이다. 서구에 의한 라틴아메리카 수탈의 역사를 통렬히 고발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아르헨티나, 스페인, 멕시코에서 먼저 출간된 ‘거울들’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현실에 천착해 온 그의 시선이 이제는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전 세계를 살펴본 결과물이다. 인류사 시초부터 현재까지 세계사의 단편들을 담은 577편의 이야기들은 저마다 감춰진 진실을 비추는 ‘거울들’이다.

책은 장구한 세계사의 이면을 투사해 진실을 들춰내는 하나의 거대한 거울이고,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역사책에 맞서는 또 하나의 역사책이다. 저자가 그러모은 거울들에 비춘 역사 속에서, 우리는 폭력과 정복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서구·백인·남성·권력자가 아닌 비서구·유색 인종·원주민·여성·민중의 시각으로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조구호 옮김/ 알렙/ 2만9000원

서두에서 저자는 ‘거울들’을 이루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확실한 문헌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비록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풀었다고 해도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그가 수집한 이야기들은 그동안 공식 역사는 물론 신문에도 제대로 실린 적이 없는 것들이다. 저자는 역사가 기술하기를 거부했거나 왜곡해 기술함으로써 역사 바깥으로 밀려난 진실들을 발굴해 한 권으로 묶었다. 따라서 ‘거울들’에서는 죽은 자가 되살아나고 익명의 존재, 무명씨가 이름을 다시 찾는다.

저자는 가려진 진실을 캐내고 위장된 사실의 허위성을 벗겨내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그는 “신문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내게 가르침을 준다. … 아마도 신문이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 그래서 나는 ‘거울들’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역사 너머를 바라보기 위해 시대와 장소, 글쓰기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신화, 민담, 민요, 대중가요, 기사, 일기, 편지, 시, 소설, 평론, 역사책, 각종 문헌 등 모든 장르를 수용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서구와 비서구가, 근대와 비근대가, 자연과 인간이, 남성과 여성이, 주인과 노예가, 삶과 죽음이, 높음과 낮음이, 고상함과 비루함이 각자 고유의 존재 방식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채 되살아난다.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된 저자의 책이 수많은 독자와 평자를 매료시키는 힘은 무엇일까? 기존의 역사 서술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법, 역사를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아내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 덕분이다. 문학은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문학은 독자가 역사의 씨줄과 날줄에 내재한 숨결을 포착하고, 자신이 속한 현실과 관계를 맺어 삶을 돌이켜 보면서 새롭게 기획하도록 이끈다. 저자의 이야기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하찮게 여겨지던 존재들이 특유의 ‘문학적’ 언어에 힘입어 역사의 주체로 우뚝 일어선다. 갈레아노 특유의 유머, 신랄한 조롱과 풍자, 감칠맛 나는 아이러니, 시적 감수성이 불의한 현실을 폭로한다. 정치적 압제로 고통을 겪어온 민중의 고난을 고발하고, 역사적·정치적 현실에 대한 민중의 투쟁과 생명력이 얼마나 강하고 질긴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역사적 진실을 발굴하는 작업에 몰두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라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에게 공식 역사는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숨이 끊어진”, “교과서에서 배신당하고 교실에서 거짓으로 포장되고, 연표 속에 잠들어 있는”, “박물관에 갇힌”, “꽃이 놓인 동상이나 대리석 기념물 밑에 매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작가”로 남고 싶어했다. 갈레아노에게 문학은, 가혹하고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무기였던 것이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