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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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외길’ 배은선 前 철도박물관장 “철도강국, 종사자들 피·땀으로 일궜죠” [차 한잔 나누며]

철도고 졸업 후 1983년 철도청 입사
입사 초 기차 지붕 뛰어다니며 일해
열악한 근무환경에 동기 3명 순직도

대학원 진학 등 철도사 연구 매진해
저서 ‘기차가 온다’ ‘철덕’들의 경전
“퇴직했지만 자료 남기는 일 계속할 것”

“철도는 사양화 산업이다.”

 

1980년 3월 서울 용산의 국립철도고등학교 1학년 교실. ‘철도개론’ 수업을 하던 교사는 신입생들에게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도로와 자동차 산업에 투자가 몰리며 교통수단으로서 철도의 가치가 점차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쇠퇴할 줄 알았던 철도는 고속철도(KTX)의 탄생과 함께 전국 곳곳을 1일 생활권으로 이어주는 대표적인 교통망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는 고속철도를 자체적으로 개발한 몇 안 되는 국가이자 철도를 수출하는 강국 반열에 올랐다.

2001년까지 운행된 대통령 전용 디젤전기동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배은선 전 철도박물관장. 코레일 제공

1980년대 당시 무거운 마음으로 수업을 듣던 까까머리 학생은 철도 분야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으며 철도사 전문가가 됐다. 1983년 철도청 입사 후 한국철도공사(코레일)에서 지난달 정년퇴직한 배은선 전 철도박물관장의 얘기다.

 

그를 3일 경기 의왕 철도박물관에서 만났다.

 

배 전 관장은 “철도를 사랑하고 뼛속까지 철도인이라는 의식은 학교(철도고)에 다닐 때 키워진 것이며, 어떻게 갚을지를 항상 생각하고 있다”며 “힘든 일도 많았지만 철도가 좋았고 철도에서 근무하면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배 전 관장이 사실상 마지막으로 재직했던 철도박물관에는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각종 사료를 모으고 복원해 내놨지만 전시 공간의 한계로 아직 대중에 공개되지 못한 자료도 쌓여 있다. 야외에 전시된 열차 등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하나하나 소개하던 그가 한 증기기관차 사진에서 걸음을 딱 멈췄다. 1950년 12월31일 남쪽으로 향하다가 경기 파주의 옛 장단역에 멈춰 분단의 상징으로 남은 증기기관차다.

 

배 전 관장은 “근무하면서 가슴이 가장 설렜을 때가 이 차를 실제로 처음 봤을 때”라며 “2007년 5월17일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 행사 참석자 100인 중 한 명으로 뽑혀 개성에 다녀왔을 때도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그는 역무원, 수송원, 차장부터 송탄역·의왕역 등 역장 등 여러 보직을 두루 거치며 역사적인 철도 현장에 있었다. 그는 “2004년 4월 고속철도 개통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에서 갓 벗어나 고속철만이 온 국민의 희망이었던 시기에 개통홍보팀에서 고속철 개통 후 시행착오를 거쳐 완전히 정상 궤도에 올라가는 것까지 지켜봤다”고 회상했다.

 

입사 초기 열차에 매달리고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등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근무환경으로 인한 아픔도 겪었다. 철도고등학교 업무과 졸업 후 전국 각지에 발령을 받은 동기 100명 중 불과 2∼3년 사이에 3명이 현장에서 순직했다.

 

배 전 관장은 “철도 강국으로 올라갈 때까지 종사자들의 피와 땀이 묻어 있다”며 “강원 태백에 있는 철암역에서 화물열차 조성작업 중 순직 친구를 떠나보내는 영결식이 철암역 구내에서 열렸는데, 조적취명(弔笛吹鳴: 철도 순직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기관차가 기적을 길게 울려주는 것) 순간 동기들이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터트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철도사 연구를 꾸준히 이어왔다. 대학원에 진학해 철도사를 공부하며 MBA(경영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철도 역사 120년을 담은 책 ‘기차가 온다’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른바 ‘철덕’이라 불리는 철도 마니아층의 ‘경전’으로 자리 잡으며 3쇄까지 나왔다.

 

배 전 관장은 “이 책을 300번 읽었다는 마니아가 있었는데 몇 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거의 외우는 수준이었다”고 전했다.

 

한국 철도는 일제 강점기 시절 기반을 닦아 태생부터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철도 강국으로 꼽히는 일본은 철도 관련 자료 등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배울 것이 많지만 이용객 입장에서 편리한 환승 시스템 등은 우리나라가 훨씬 앞서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퇴직 후에도 그는 철도사 연구 등 활동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배 전 관장은 “여건이 허락되는 한 지금의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싶다”며 “읽지 못했던 책을 원 없이 읽고, 쌓아놓은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둬 나중에 철도박물관에 자료실이 만들어지면 모두 기증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의왕=백소용 기자 swini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