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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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칼럼] 판결문 전면공개 검토할 때다

재판 결과 핵심 담은 판결문에도
최태원 회장 이혼소송 같은 오류
공개 확대하면 작성 신중해질 것
토종 리걸테크 육성에도 꼭 필요

선고 공판은 긴장의 순간이다. 유무죄가 갈리고 형량이 결정된다. 승·패소가 판가름나고 승소 액수가 정해진다. 결론 격인 주문(主文)부터 먼저 읽어주면 좋으련만 야속할 뿐이다. 선고 이유부터 설명한다. 들어보면 유죄 같기도, 무죄 같기도 하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야말로 듣다 보면 탄핵 인용이라는 건지, 기각이라는 건지 헷갈린다.

형사재판 판결 선고라면 판사가 자리에서 일어설 때까지 주문이 끝난 게 아니다. ‘피고인을 징역 1년에 처한다.’ 피고인으로선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다. ‘다만, 이 판결 확정일부터 2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이런 주문을 기다리면서. 다행히 법정 구두 선고와 달리 송달된 판결문은 주문부터 나오고 판결 이유가 뒤에 바로 이어진다.

박희준 수석논설위원

‘1.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2. 소송 비용은 피고 부담으로 한다. 3. 1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봐도 금세 오류가 드러난다. 2항에서 ‘원고’가 ‘피고’로 잘못 적혀 있다. 소송 비용은 패소한 측이 부담하는 게 원칙이다. 3항의 가집행 주문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엉터리 판결문이 있을 수 있을까.

30년 넘은 판사생활을 마치고 퇴직한 지인이 고등법원에서 실제로 본 판결문이 그랬다. 다른 판결문에 있는 주문을 잘못 ‘복붙’한 것 같다고 했다. 원고 패소가 아니라 승소 판결문을 잘못 가져다 쓴 것이다. 1·2항을 수정하고 3항을 삭제해야 하는데, 1항만 맞게 고쳤다. 이런 판결문 오류가 그대로 고법 항소심까지 올라갔으니 황당한 일이다.

민사사건 항소를 맡은 한 변호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판결 주문만 읽어보면 원고가 승소한 것이라서 굳이 항소해 다툴 이유가 없었다. 주문 다음에 이어진 이유를 살펴봤더니 잘못이 보였다. 주문에 적힌 승소 금액과 이유에서 언급한 금액 사이에 1억1000만원가량이나 차이가 났다. 액수를 이유 부분에선 제대로 적고 주문에서 잘못 적은 것이다.

얼마 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항소심 판결문에서 오류가 있어 논란이 됐다. 최 회장의 SK㈜ 지분 근간이 된 옛 대한텔레콤 주식 가치 산정에서 1주당 1000원을 100원으로 계산한 것이다. 재판부가 두 차례 이뤄진 액면 분할을 감안하지 않아 생긴 오류다. 재판부는 잘못을 바로잡는 판결문 경정(更正)을 하고서도 1조3808억원의 재산분할 액수 주문은 따로 바꾸지 않았다. 계산 오류가 판결 주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는 최 회장 측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일 수밖에 없다.

판사도 실수할 수 있다지만 판결문 오류는 절대로 없어야 한다. 갈등의 최종 심판자로서 엄정성을 해칠 수 있어서다. 판결문 공개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계속 나오는 이유다. 판결문이 일반에게 바로 공개된다면 판사는 작성에 더욱 신중을 기할 게 분명하다.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는 헌법 제109조 정신에도 맞는다.

법원도 판결문 공개 범위를 꾸준히 늘려가는 추세이기는 하다. 각 법원 홈페이지에 ‘판결서 열람’, ‘판례정보’ 유료서비스를 하고 있다. 하지만 판결이 확정되어야 하고 비실명화를 거치다 보니 너무 더디다. 대상도 특정 시점 이후 확정된 판결로 제한적이다. 소송에 등장하는 개인과 기업이 다수인 경우 비실명 기호들로 인해 암호문처럼 해독이 쉽지가 않다.

현실로 다가온 ‘AI(인공지능) 시대’에 판결문을 법원 창고에만 쌓아둬서도 안 된다. 공개 가능한 사항을 일일이 열거하는 포지티브시스템이 아니라 공개 불가능한 것만 열거하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판결문은 LLM(거대언어모델) 기반의 ‘생성형 AI’와 리걸테크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텍스트다. ‘디지털 상록수 운동’을 펼치는 강민구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이를 ‘잠자는 백설공주 깨우기’라고 부른다. 토종 기업을 키우지 않으면 국내 리걸테크 시장을 미국의 대형 기업들에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정보 보호를 내세우는 반대 논리도 있다. 하지만 공개 법정에 서고서도 보호받을 프라이버시가 있다면 당사자가 익명화를 신청하도록 하면 될 일이다.


박희준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