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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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역사적 아픔의 대물림,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죠” [차 한잔 나누며]

권혁인 BBC 라디오 드라마 작가

2023년 ‘스테디 아이즈’ 국제 공모
韓 첫 영어 비모국어 부문 우승
BTS 노래 등 한국적 요소 가득
“전쟁 트라우마가 3代 끼친 영향
대 이어 겪는 무력감 등 이야기”

BTS 노래를 즐겨 듣고, 오랜 ‘취준’(취업준비) 생활로 집에 돌아갈 때마다 엄마와 냉전을 치르는 딸 루아. 아들만 바라본 엄마에 대한 서러움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지만, 자신 또한 사랑을 베푸는 데 서툰 엄마 순자. 6·25전쟁과 일제 식민지배가 만든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할머니 정희. 삐걱대는 관계 속의 3대에게 어느 날 신비한 외계 광선이 나타나 지구 생명체들을 납치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진다. 

 

‘엄마’와 ‘외계인’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권혁인(38) 작가가 영어로 집필한 BBC 라디오 드라마 ‘스테디 아이즈(Steady Eyes)’의 도입부다. 권 작가는 이 작품으로 BBC 월드서비스와 영국문화원이 지난해 말 주최한 ‘제28회 국제 라디오극 공모전’에서 한국인 작가 최초로 영어 비모국어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스테디 아이즈’는 지난달 15일(현지시간) BBC 월드서비스 라디오 채널에서 방송됐고, 현재 BBC 홈페이지에서도 청취할 수 있다. 

권혁인 작가는 ‘스테디 아이즈’를 “모녀 3대의 갈등을 그리는 가족 드라마에 외계 생명체의 지구인 납치라는 공상과학적 요소가 버무려진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권혁인 작가 제공

권 작가는 ‘스테디 아이즈’를 한국의 역사적 아픔이 어떻게 되물림되는지를 탐구한 가족 드라마라고 소개했다. 그는 “전쟁의 트라우마가 3대에 걸쳐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듣고 이를 꼭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며 “역사적 아픔과 맞물려 있는 심리적인 문제들, 즉 대를 이어 내려오는 자존감과 사랑의 결핍, 사회·경제적 결핍과 무력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드라마”라고 말했다. 

 

근미래의 한국 서울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모녀 3대의 갈등은 언뜻 개인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역사가 남긴 집단적인 트라우마가 숨어 있다. 루아는 할머니가 일제강점기 때 ‘위안부’가 될 뻔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외계 생명체에게 납치된다면 성노예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외계인의 집단 납치 사건은 등장인물들에게 즉각 식민지배를 떠올리게 한다. 권 작가는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경험에 대해 일부나마 꼭 글로벌 청취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라디오 드라마 ‘스테디 아이즈’는 BBC 홈페이지에서 현재도 청취할 수 있다. BBC 홈페이지 캡처 

영국에서 송출된 드라마지만, 스테디 아이즈는 한국적인 요소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작품이다. 작중 BTS의 노래 ‘Fake Love’부터 ‘학원’ 등 한국어 단어까지 한국적인 요소들이 번역 없이 툭툭 등장하기도 한다. 권 작가는 “제가 BTS의 팬이라 자부심을 가지고 노래를 도입부에 사용했다”고 웃으면서도 “문맥상 의미 전달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더 한국적이고 현실성 있는 느낌을 위해 번역 없이 사용한 한국어도 있다”고 설명했다.

스테디 아이즈의 출연진이 지난 11월 영국 런던 BBC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하고 있다. 권혁인 작가 제공 

라디오 드라마라는 매체는 TV 드라마에 비하면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매체다. 시각적인 신호가 없기 때문에, 가정집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서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 도마 위에서 야채를 써는 소리,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등을 들려줘 청취자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런 음향효과 또한 극을 쓴 권 작가가 구상해야 하는 부분 중 하나다. 영화 전공자인 권 작가는 “영화 후반작업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녹음을 하고 보니 영화보단 연극 제작에 가까웠다”며 새로운 도전이었다고 밝혔다.

영어로 국제 라디오 드라마 대회에서 수상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해외에서 10년 이상 머무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권 작가로부터 “영어로 해외에서 공부한 것은 이것저것 합쳐서 3년이 조금 넘는다”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나처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창작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그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 읽고 듣다 보면 출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권 작가는 우연히 시작한 라디오극 도전이 성공을 맺은 것은 “끈기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재밌겠다, 한번 해 보자는 생각으로 도전했지만 결심하고 난 다음부턴 2년마다 열리는 공모전에 6년에 걸쳐 계속해서 출품을 했다”며 “안 되면 또 한다는 마음으로, 일단 주저하지 말고 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윤솔 기자 sol.yu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