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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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동해 일출 보려던 주부 피살…'10년 금강산 관광' 막 내리다

50대 박왕자 씨 해변 나갔다 북한군에 희생[사건 속 오늘]
北 "매뉴얼대로" 주장…이명박 정부도 경협 중단 강경대응

1998년 '금강산 관광 프로그램' 운영을 놓고 남북이 손을 맞잡았다. 그해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500마리의 소 떼를 트럭에 싣고 방북해 물꼬를 텄고, 11월 현대아산은 실향민과 관광객, 승무원 등 135명을 태운 금강산 첫 관광선 '현대 금강호'를 동해항에서 금강산으로 보냈다.

 

이후 금강산 관광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됐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에는 육로관광이 실시됐으며 2008년 3월부터는 승용차 관광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2008년 7월 11일 새벽, 금강산에서 대한민국의 평범한 50대 주부인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에 쏜 총에 맞아 숨지면서 10년간 200만 명의 남한 관광객을 끌어모은 금강산 관광이 막을 내렸다.

 

◇ 북한 "어둠 속 통제구역서 움직이는 사람, 경고에도 안 멈춰…매뉴얼대로 사격"

 

박 씨는 여행 마지막 날 새벽 4시께 혼자 숙소 밖을 빠져나왔다. 이후 5시 10분께 친구들이 깨어나 박 씨가 없는 걸 확인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박 씨가 해돋이를 보고 싶다고 했고, 해변도 산책해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씨는 2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오전 9시 반쯤이 되자 북한 측이 충격적인 통보를 해왔다. 박 씨가 총에 맞고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것이었다.

 

북한 측 주장에 따르면 박 씨는 호텔에서 나와 금강산 해수욕장 1.1㎞를 걸어 통제구역에 도착했다. 당시 박 씨는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북한 측은 박 씨가 2m 높이의 철제 펜스를 넘어갔다고 했다. 이어 펜스에서 800m 떨어진 북한군 초소 앞까지 다다른 박 씨가 북한군의 눈에 띄었고, 이에 북한군이 경고하자 박 씨가 북한군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도망갔다는 게 북한 측의 설명이다.

 

박 씨를 지켜보던 북한군은 경고용 공포탄 1발을 발사했다고 했다. 공포탄 소리에 놀란 박 씨는 왔던 길 500m를 되돌아갔고, 북한군은 박 씨가 멈추지 않아 실탄 사격을 시작했다고. 그렇게 박 씨는 그중 두 발의 총에 맞아 경계선 300m를 앞두고 숨을 거뒀다고 북측은 주장했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의 피해자 故 박왕자 씨(당시 53세). KBS 캡처

◇ 박 씨 말고도 해변가에 관광객 더 나와 있었다

 

북한은 오전 4시 55분에 박 씨를 사격했다며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두웠으므로 피아식별이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어둠 속 움직이는 사람을 향해 멈추라고 경고했으나 서지 않고 도망갔고, 통제구역이었으므로 군의 매뉴얼대로 총을 쐈을 뿐이라는 것.

 

하지만 이날 일출 시각은 5시 11분이었다. 새벽 5시께 이미 사위가 환했고, 피격 시간이 만약 5시 10분 이후라면 북한이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시간, 바다에는 박 씨뿐만 아니라 다른 관광객들도 있었다. 이들이 기억하는 것은 북한 측의 주장과 달랐다. 목격자들이 총성을 들은 시간은 5시 15~20분 사이였다. 이미 해가 떠 있었을 때였다.

 

목격자 A 씨는 "동트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제 앞으로 한 분이 해변에 바짝 붙어서 걸어가셨다. 그분이 여성분인 것도 식별했고 검은색 옷을 입고 그 위에 흰색 점퍼인지 수건인지를 쓰고 계신 것도 알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총소리와 비명이 들렸다"고 했다.

 

관광객이 찍은 사진도 증거로 남았다. 일출을 보기 위해 나온 관광객이 3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5시 13분에 찍힌 사진은 이미 완전히 밝아진 때로, 박 씨가 민간인 여성인 걸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 사진은 5시 16분에 찍혔는데, 사진을 찍은 이는 이때 '탕'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또 다른 의심 정황도 있다. 북한군은 먼저 공포탄 1발을 쏘고 실탄 3발을 쏴 그중 2발이 명중했다고 했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2번의 총성을 들었다고 했다.

 

◇ 우리 정부, 자체 모의실험 후 "북한 주장 말이 안 돼"

 

사건 발생 후 북한은 우리 정부의 현장 조사를 거부했다. 이에 우리 정부의 합동조사단은 박 씨와 신체 조건이 비슷한 50대 여성을 섭외해 피격 사건 현장과 비슷한 강원 고성군 해안지역에서 피격 상황을 재연했다. 모의실험 결과 북한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과학적인 추론이 도출됐다.

 

합동조사단은 먼저 박 씨의 셔츠에 남아있는 탄흔의 위치로 봤을 때, 박 씨는 피격 당시 뛰어간 것이 아니라 멈춰 서 있거나 아주 천천히 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또 박 씨를 조준했던 인민군은 멀리서 총을 쏜 것이 아니라 100m 앞에서 조준 사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박 씨의 등과 엉덩이에 두 발을 맞출 정도의 명중률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500m나 떨어진 거리는 육안으로도 식별하기 힘들어 도저히 명중할 수 없는 거리인 데다 정지한 것도 아닌 움직이는 물체를 3발을 쏴 2발을 맞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우리 조사단은 결론 내렸다.

 

◇ "北, 박 씨 쏜 10대 신참 여군에 훈장"…금강산 관광 중단 16년째

 

피격 사건 발생 열흘 후 박 씨를 저격한 북한군의 정체에 대한 보도가 나왔다. 당시 동아일보는 박 씨를 총격한 건 17세의 어린 여군이라고 전했다. 입대한 지 얼마 안 된 신참 여군이 근무 수칙을 경직되게 고수해 일어난 우발적 사건으로, 북한 당국도 내부적으로 당혹스러워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후 북한 중앙당은 해당 여군에게 북한의 최고 훈장인 국기훈장 1급을 수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으로 남측이 보수정권으로 바뀐 상황에서 남북은 책임을 놓고 서로 다른 결론을 내며 갈등의 골은 깊어져 갔다. 정부는 피격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재발 방지 및 신변 안전보장 조치를 재개 조건으로 요구하며 책임 있는 당국 간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북한은 확실한 사과나 재발 방지 약속을 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남북 관계는 장기적인 경색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후 2010년 3월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로 남북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최악의 상황에 빠진 상황에서 북한은 2010년 4월 금강산지구 내 남측 시설과 재산을 몰수하고 체류 인원을 전원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명박 정부는 '개성공단을 뺀 모든 남북 경협 중단'을 골자로 한 5·24 대북 제재를 가동하면서 금강산 관광 중단의 장기화를 알렸다.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