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경북 안동시 임하면에서 30년 넘게 사과 농사를 지어온 김모(61)씨는 11일 통화에서 지난 며칠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쏟아지는 장맛비에 불어난 소류지 물이 김씨의 밭을 덮쳤기 때문이다. 3300㎡에 달하는 밭 가운데 20% 이상이 빗물에 잠긴 상황 속에 김씨는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전날 이웃집에서 펌프를 빌려와 밭의 물을 가까스로 빼냈다. 하지만 폭우로 사과나무 가지가 여기저기 잘려 나갔다. 밭 곳곳에는 여전히 물이 고여 있었고,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사과 열매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김씨는 “폭염 속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돌봤던 사과나무가 쓰러진 모습을 보니 한숨밖에 나지 않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매섭게 쏟아지던 장맛비가 다소 주춤해졌지만 농민의 주름살은 좀처럼 펴지지 않고 있다. 애써 가꾼 농작물이 물에 잠기거나 토사에 휩쓸려 못 쓰게 돼서다. 특히 폭우가 집중됐던 중·남부 지역의 농작물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고 있다.
충북도에 따르면 음성군 감곡면의 복숭아 농가도 울상이다. 연이은 장대비와 함께 강풍이 불면서 복숭아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낙과 피해를 본 탓이다. 5년 전 서울에서 귀농해 복숭아 농사를 짓는 50대 김모씨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리고 강풍 때문에 복숭아가 과수원에 나뒹굴고 있다”면서 “복숭아를 수확하고 출하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이런 일이 벌어져 너무 당황스럽다”고 울상을 지었다.
전북 익산시 만성면의 비닐하우스 시설 39개 동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배 중인 왕봉수(60)씨는 최근 사흘 동안 230㎜가 넘는 폭우로 8개 동이 침수되는 피해를 봤다. 얼핏 보기에 토마토는 빨갛게 익어 수확해 세척하면 될 듯싶지만, 이미 빗물을 머금어 맛이 변질되고 모양이 금세 쪼그라들어 내다 팔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인근에서 만난 시설재배농 이모(44)씨는 “일대가 금강 하류 낮은 지대여서 호우 때마다 물에 잠기기 일쑤”라며 “지난해 수해 때도 배수장을 추가로 설치하겠다고 했지만 예산 부족을 이유로 미뤄져 올해도 악순환이 반복됐다”고 토로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전국 농작물 침수 면적이 전날 오후 6시 기준 9522㏊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는 축구장(0.714㏊) 1만3000개가 넘는 면적이다. 농작물 피해가 가장 큰 곳은 충남으로 7086㏊가 침수됐다. 다음으로는 경북(1318㏊), 전북(1082㏊) 순이다. 피해를 입은 농작물은 벼가 7456㏊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수박(116㏊)과 포도(99㏊), 멜론(86㏊), 참외(74㏊) 등 과일·과채류의 피해도 잇따랐다. 가축 피해 역시 크다. 집중호우로 축사 21㏊가 침수 또는 파손된 것으로 집계됐다. 닭 31만5600마리를 비롯해 33만9000마리가 폐사했다.
농식품부는 폭우로 인한 농작물 피해 대책을 마련하고자 간부들을 현장에 급파해 침수 농경지 퇴수 조치 등 2·3차 피해 최소화를 위한 조처를 했다. 비가 그친 후 탄저병 등 병해충 피해가 없도록 생육관리협의체를 통해 생육 관리를 강화할 계획이다.
한편, 손해보험업계에 따르면 지난 6일부터 이날 오전 9시까지 자동차보험 판매 손해보험사 12개사에 침수 피해 등이 접수된 차량은 모두 1569대로, 추정 손해액은 143억300만원 수준이다. 전북과 충남에서 피해 접수가 가장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