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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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죽쑨다고 트럼프와 ‘엄지척’ 해서야…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헝가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이자 유럽연합(EU) 회원국이다. 서방 세계의 일원이란 뜻이다. 그런데 헝가리는 나토의 ‘적’에 해당하는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돕길 거부한다. EU의 대(對)러시아 경제제재 동참에 소극적이며 EU가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데 반대한다.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서방이 일치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노골적으로 균열을 내고 있는 셈이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유럽의 이단아’로 불리는 이유다.

 

11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왼쪽)가 회의 종료 후 곧장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로 달려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나란히 ‘엄지척’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오르반 총리 SNS 캡처

EU 이사회의 의장국은 27개 회원국이 6개월씩 돌아가며 맡는다. 7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헝가리가 의장국이다. 오르반 총리는 지난 5일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났다. 그는 헝가리가 EU 의장국임을 강조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끝낼 방법이 알고 싶다”고 말했다. 교전 중인 두 나라 사이에서 EU 의장국 자격으로 중재를 시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에 푸틴 대통령도 “오르반 총리가 EU 의장국으로서 왔다고 이해한다”고 화답했다.

 

EU는 발끈하고 나섰다. EU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대외관계청(EEAS)은 성명에서 “이번 회담은 순전히 헝가리·러시아 양자관계의 틀 안에서 이뤄졌다”고 밝혀 오르반 총리가 EU를 대표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나란히 EU를 이끄는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역시 “오르반 총리의 방러는 헝가리 정상으로서의 활동일 뿐 헝가리가 EU 의장국이란 점과 무관하다”고 성토했다. 하지만 EU나 나토가 뭐라고 하든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오르반 총리의 ‘독불장군’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

 

10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위해 도열하는 도중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웃으며 앞을 지나가자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슬쩍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9∼11일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나토 창립 75주년 기념 정상회의가 열렸다. 오르반 총리 역시 행사 주최자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그런데 그는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쏙 빠졌다. 11일 정상회의 일정이 모두 끝나자마자 플로리다주(州) 마러라고 리조트로 달려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만났다. 얼마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오르반 총리는 “그(트럼프)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러시아·우크라이나 휴전협정 체결을 밀어붙일 것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 대놓고 트럼프 편에 선 것이다. 바이든의 초청으로 방미해 융슝한 대접을 받고 나서는 정작 트럼프의 손을 번쩍 들어준 셈이다. 요즘 고령에 따른 실언 논란으로 바이든이 죽을 쑤고 있긴 하나 그렇다고 이래도 되나. 바이든이 연임에 성공하는 경우 ‘유럽의 이단아’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